출입구를 찾아서: 장서영의 〈Circle〉

장서영, 〈Circle〉
싱글채널영상, 8분, 2017.


1. “내 모국어에서 동사는 문장 끝에 오기 때문에 의미를 알 때까지 기다려야 해.”

처음과 끝을 모두 보아야 그 작품을 다 봤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텔레비전 드라마를 1회부터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어느 순간 드라마가 유명해지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면 나도 자연스럽게 따라서 보고 있다. 어느 날은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친구는 드라마도 영화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본다고 했다. 오타쿠의 강박이라나 뭐라나.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아예 재생 바를 조절해가면서 띄엄띄엄 빠르게 드라마 한 시즌을 끝내거나 유튜버가 요약설명 해주는 영상으로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이 모든 방법이 ‘작품은 본’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드라마의 결말을 향해서 달려간다는 점에서 결국 선형적인 서사를 따라간다고 할 수 있다. 그 주어진 서사를 따라가 끝을 아는 것이 결국 의미를 아는 것이다. 처음은 놓칠지라도, 결말을 흥미진진하게 기다리면서 끝을 보아야 작품을 본 것이다.


2. “너는 시작보다도 끝을 먼저 봤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나 전시장에서 영상을 볼 때는 다르다. 미술 영상은 시작부터 끝까지 볼 수도 있지만, 중간의 어느 지점부터 보기 시작하여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 지점까지 볼 수도 있고, 중간의 어느 지점부터 보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보기를 멈출 수도 있다.

이 중 어느 것도 정답이거나 오답이 아니다. 미술관은 영화관이나 극장처럼 작품의 시작과 끝을 강제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든지 시작지점이 될 수 있고, 언제든지 끝이 될 수 있다. 작가는, 혹은 기획자는 60분짜리 영상이 대여섯편씩 전시되는 전시에서 관객이 모든 작품을 보기를 기대할까? 관객이 작품의 일부만을 보고 지나간다는 선택지는 차치하더라도(허공에 말하고 있는 자신을 다소 가여워하는 <서클>처럼), 관객이 모든 영상을 시작부터 끝까지 순차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시작보다 끝을 먼저 보는 일이 훨씬 잦다. 그리고 장서영의 <서클>은 이를 노골적으로 말한다. “너는 이것이 어떻게 끝나는지 알거야.”

그러면서도 끝까지 볼 것을 요구한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처음 본 지점에 다다를 때까지 볼 것을 요구한다. 끝을 안다고 ‘작품을 본’ 게 아니다. 결말을 봤다고 해서, 영상의 타이틀이 다시 올라오고 같은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때, 시시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결말을 ‘스포일러’했다고 따지지도 않는다. 끝은 끝대로, 시작은 시작대로 의미를 갖는다.


3. “네가 들어온 지점에 다다른다면 그게 출구니까 놓치지마”

순환하는 영상에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없다. 그러한 순환은 곧 입구도 출구도 없는, 영원히 순환하는 무언가로서 부정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미래에 대한 발전적 전망이 보이지 않는 현재 같은 것을 가리킬 때, 그것을 순환하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탈출구 없는 영원한 반복. 그러나 한편으로 입구와 출구가 따로 없다는 것은 어디나 입구와 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착역을 향해서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기차가 아니라 어디서든 타고 내릴 수 있는 2호선 같은 것이다. 영원히 갇힐 필요는 없다고, 충분하다고 느낀다면, 놓치지 말고 출구를 찾아 나가라고 한다.

결국 <서클>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잘 해보겠다는 말을 남기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같은 것을 반복한다. 다시 잘 해보겠다. 순환하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볼 기회, 새로운 것을 발견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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