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고 어두운』
기획 · 편집: 권정현, 조주현
글: 천선란(소설), 권정현(비평)
디자인: 하형원
발행처: YPC PRESS
발행일: 2020. 5. 15.
사양: 126쪽, 100*176
ISBN: 979-11-970327-0-7(02600)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 ··· 천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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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SF가 아니다 ··· 권정현
이러한 SF적 설정은 그대로 소설가 천선란에게 전해진다. 바톤을 이어받은 소설가는 ‘흑공’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SF소설을 창작한다. 소설의 주인공 은지는 아르바이트와 학교 생활을 병행하며 늘 돈에 허덕이는 대학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철원 비무장지대에서 운동장만 한 크기의 ‘구멍’이 발생하고, 아무 상관 없던 은지의 삶도 바뀌게 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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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후기]
지난 12월, 개인전을 준비하던 조주현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시에 SF적 요소가 들어가고 SF소설가와 협업하여 전시를 꾸리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SF 설정에 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서사는 부재했고 설정 자체도 조리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그 사이에서 제가 무언가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욕심이 났습니다. 이전부터 미술과 문학 사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미술이 문학에 접근하는 방식에 불만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냥 주제만 던져주고, 자유롭게 써달라고 하면 그게 협업인가?” 같은 식의 약간은 대안없는 비판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욕심을 내서 전시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조주현 작가의 전시와 어울릴 SF 소설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천선란 소설가는 묘하게 젊음과 무거움이라는 상반되지는 않지만 짝지어지기는 어려운 두 속성을 가진 작가여서 관심이 갔습니다. 천선란 소설가의 단편소설들을 보면서 ‘젊은 작가’이기에 구현할 수 있는 생동감과 그에 어울리지 않게 무겁고 진지한 태도가 느껴졌습니다. 그 부분이 조주현 작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섭외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선란 소설가는 아직 설정도 미흡하고 조건도 미흡한 우리의 프로젝트에 흔쾌히 함께 해주기로 하였고, 많은 것이 결여되어 있던 설정으로부터 서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세 달여 만에 완성된 소설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 따끈따끈한 소설의 첫 번째 독자가 되는 일은 처음 느껴보는 짜릿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설이 완성되면서 전시의 큰 부분이 채워지게 되었고, 조주현 작가 또한 본인의 설정에서 출발한 소설이지만 오히려 소설을 바탕으로 작업에 한 겹의 레이어를 추가하면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책에는 일반적인 소설 단행본에서 그러하듯이 평론가의 작품 해설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제가 직접 글을 써서 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비용 문제 때문에 제가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무리를 해서라도 다른 사람이 썼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조주현 작가의 작품 〈흑공〉과 〈지지대〉, 천선란 소설가의 단편소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의 협업이 스스로 만족스러운 점은 어느 한쪽이 한쪽에게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미술이 문학을 초대해서 ‘어떤 주제로 글을 써주세요’하고 그 주제로 완결되고 독립적인 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술작가가 만든 미완의 설정을 소설가가 구체화하고, 그 서사가 다시 미술작가의 작업의 일부가 된다는 점입니다. 조주현의 ‘흑공’이 천선란 소설의 기본 재료가 되고, 또 역으로 그 소설이 다시 조주현 작업에 한 겹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작업이 하나의 테제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매체의 작품이 아니라, 미묘하게 만나고 헤어지고 어긋나고 중첩된다는 것입니다. 조주현 작품의 ‘흑공’과 천선란 소설의 ‘구멍’이 완전히 동일한 설정이 아니기에 흑공은 흑공대로, 구멍은 구멍대로 제 갈 길을 갑니다. 천선란은 조주현이 미흡하게 나마 제시한 흑공의 설정에서 출발하여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고, 조주현은 천선란이 만든 흑공의 세계를 자신의 작품에 덧붙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작품을 그 서사에 끼워 맞추치도 않습니다. 이러한 상호 의존성과 독자성의 관계가 협업의 의미를 빛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미술과 문학의 협업에서 시도해보고 싶은 것은, 미술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문학적 문법이나 형식, 개념, 관습에 대한 전유 같은 것입니다. 지금 제 말에서 느끼셨겠지만, 저조차도 그것을 아직 명확하게 구체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시도해보지 못했고, 아쉬운 점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단지 주제적 측면에서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적, 형식적 측면에서 서로 공유하는 협업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아직은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가능한 무언가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아쉬운 점은 앞서 언급했듯이 제가 비평을 써서 수록한 점입니다. 저는 종종 SF소설도 읽고 한국 SF에는 어떤 흐름이 있는지, 요즘 순문학과 SF 사이의 논쟁은 무엇인지 같은 이론은 아는 편이지만, 고백하자면 SF의 성실한 독자는 아닙니다. 유명한 SF 작품들, 요즘에 회자되는 작품들을 읽었지만, SF 독자층 내부에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가 보면서 분명히 놓친 부분이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제가 작품을 보는 방식 자체가 그저 ‘순문학’을 읽는 방식에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가능성이 있는 서사를 일면적으로, 조금은 시시하게 읽어버리는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SF의 문법이나 여러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이 짚어낼 수 있는 지점이 분명 더 있을 것이고, 책이 우리의 손을 떠난 뒤에 그러한 논의와 함께 돌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그동안 주문 받은 책을 편집한 것과 달리 첫 기획 출판물을 만들면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들을 놓친 점입니다. 책 그 자체만이 아니라 책 뒤에서 사람들의 일을 조율하고 진행하는 것 또한 중요한데, 그 부분에서 미숙한 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성격상 어떤 상황에서도 일을 밀고 나가는 불도저 같은 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않거나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조율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진행자로서 미흡한 저의 역량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전시, 한 권의 책 뒤에서 함께한 많은 분에게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또 다른 프로젝트에서 다시 만나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책을 읽어주실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