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창비, 2018
일하는 여자의 회사에는 다양한 동료가 있다. 부장님이 재수없는 꼰대인 것은 현실에서나 드라마에서나 한결 같다. 드라마에서는 잘생긴 남자주인공이 동료 혹은 상사로 등장해 여자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도와주고 고달픈 회사 생활을 잊게 한다. 여자의 여자 동료는? 조연 중의 조연인 여자 동료들은 종종 회사의 소문을 물고 와서 알려주는 역할을 하거나 은근히 경쟁하면서 무언가를 숨기는 경쟁자 역할을 한다.
최근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드물게 여자 주인공의 직장 생활을 입체적으로 다룬다. 여기서 여자 주인공의 회사에는 은근히 서로를 견제하는 경쟁자로서 동료, 일 잘하는 동료, 싹싹한 후배, 롤모델이라고 부를만큼 멋진 선배까지. 다양한 인물 사이의 관계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으나, 그들은 결국 여자의 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옥상에서 만나요」의 여자는 다르다. 여자에게 가장 힘이 되는 것은 같이 일하는 언니들이다. 유명 스포츠신문 광고사업부에서 일하는 여자는 온갖 쓰레기 같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일한다. 성희롱을 서슴없이 내뱉는 남자, 접대라는 명목으로 아저씨들을 술집에 데려다줘야하는 업무, 여자가 가장 노릇을 해야하는 집구석까지. 탈출구 없는 지옥 같은 여자의 삶에서 유일하게 숨 쉴 구멍은 옥상에서 만나는 언니들이다.
“언니들이 아니었으면 난 정말 뛰어내리고 말았을 거야. 경리부의 맏언니 명희 언니, 편집기자인 소연 언니, 제작물류부의 예진 언니. 세 사람은 마치 운명의 마녀들처럼,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었어.”
그 언니들과 옥상에서 만나는 짧은 시간. 한 달에 한 번씩 같이 외출을 해서 영화를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신나게 욕하면서 웃고 떠드는 시간. 여자는 그 시간에만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 때, 언니들은 한 명 한 명 ‘결혼’이라는 것을 해버리면서 회사를 탈출한다. 혼자 남은 여자는 유일한 숨 쉴 구멍을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보낸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졌을 때, 여자는 언니에게 원망하듯 따진다. “셋 다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결혼해버린 거야?”
언니들은 마치 “마녀들처럼” 나를 앞에 앉혀두고 그 비밀스럽고 괴상한 주문에 대해 진지하게 말한다. 천생연분인 남자를 바로 내 앞으로 소환시키는, 고대부터 내려온 괴상한 주문을. 언니들이 그 비밀스러운 주문을 이야기 할 때, 정말 여자가 그 주문을 외자 괴상한 생명체가 소환되었을 때, 독자는 그 순간 깨닫는다. 아 맞다, 이건 정세랑 소설이었지.
그 주문과 함께 독자는 판타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마치 내 일기를 보는 것처럼 현실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소설이 된다. 그러나 이때 ‘판타지’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마치 진짜 일어날 것처럼 꾸미는 판타지가 아니다. 가난한 여자가 재벌 남자를 만나는 판타지처럼 현실과의 구분을 묘하게 흐리면서 독자를 기만하는 판타지가 아니다. 이건 그냥 판타지다.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의 이야기. 독자는 그 괴상한 주문을 외워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 수는 있지만, 결코 이를 믿지는 않는다.
언니들이 알려준 주문으로 특별한 남편을 만난 여자는 지옥 같은 세계를 탈출해 새로운 삶을 꾸린다. 그리고, 다시 그 옥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다른 여자, 아마도 불행할 여자를 위해 그 주문을 남긴다.
“하지만 너는, 내 후임으로 왔다는 너는, 아마도 그 옥상에 자주 가겠지. 내가 너에 대해 이상한 책임감을 느끼는 게 왜인지는 모르겠어.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랑 이야기는 사실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그러니 부디 발견해줘.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너의 운명적 사랑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기이한 수단을. 옥상에서 만나, 시스터.”
그렇기에, 그 대신 책을 덮었을 때에 떠오르는 것은 나를 구원할 가상의 남편이 아니라, 언제나 내 옆에 있는 언니들이다. 갑자기 핸드폰을 들어 나의 언니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지게 하는 이야기, 그게 정세랑의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주문’ 같은 것이 아니다. 언니가 여자를 구했고, 여자가 또 다른 여자를 구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