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절린드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논의와 동시대 예술


2018 Society of Visual Cultures 추계학술대회 발표문

0. 시작

동시대 미술 텍스트에서 로절린드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이론을 만나는 일은 꽤나 잦다. 그러나 이런 저런 경로로 접한 포스트매체 이론의 파편을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전체가 보이지 않았다. 코끼리를 제대로 보려고 크라우스의 텍스트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하나씩 드러나는 코끼리의 실체는 예상과 달랐다. 동시대 담론을 통해 알게 된 일부분을 토대로 내가 이해(혹은 상상)하고 있었던 전체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그려졌다. 그 다른 모습은 내가 파편적으로 이해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웠고,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논의처럼 느껴졌다. 나는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논의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동시에 내가 흥미롭게 바라본 부분을 중심으로 석사 논문을 제출했다.

내가 크라우스를 읽으면서 관심을 가진 지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크라우스가 미디엄(medium)과 미디어(media)의 이분법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예술 매체에 한정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대표 주자로 알려진 크라우스가 설치미술, 관계미술 등의 동시대 경향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크라우스가 미디엄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예술의 자율적 조건을 확보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 세 번째 특징은 결국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이론의 핵심이고, 앞의 두 가지 특징도 이에 수렴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발표문은 이 세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나의 학위논문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나아가 내가 크라우스의 주장에 매료된 지점이지만 학위논문에서 정교한 주제로 발전시키지 못했던 생각의 단편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해보고자 한다.


1. ‘포스트매체 조건’이란 무엇인가

‘포스트매체(post-medium/media)’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여러 담론에는 상이한 맥락이 있다. 마치 ‘매체’라는 단어가 예술작품의 재료부터 신문, 방송, 인터넷에 이르는 다양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포스트매체’도 어떤 ‘매체’의 이후(post)를 다루느냐에 따라 다른 맥락에 속하게 된다.1 첫 번째는 ‘포스트매체’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입장이다. 가타리는 ‘매스미디어 시대 이후’의 의미로 ‘포스트-미디어 시대(post-media age)’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각각의 개인들 또는 집단들이 개별적으로 접속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매체 시대를 예견하였다.(Gary Gensko, “The Promise of Post-media,” in Provocative Alloys: A Post-media Anthology (London: Post-Media Lab & Mute Books, 2013) 참고) 두 번째는 전통적인 미적 매체가 퇴조하는 상황을 다룬 크라우스의 입장이다. 세 번째는 뉴미디어 아트 진영의 입장이다. 이들의 논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이전의 뉴미디어 아트의 상황이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문제의식을 골자로 한다. 대표적으로 Peter Weibel, “The Post-media condition”, 2012, http://www.metamute.org/editorial/lab/post-media-condition; Lev Manovich, “Post-media Aesthetics”, 2011, http://manovich.net/content/04-projects/032-post-media-aesthetics/29_article_2001.pdf이 있다. 그중에서도 크라우스는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미술의 미디엄이 전통적인 미적 미디엄에서 벗어나 다양한 미디엄으로 확장된 상황을 ‘포스트매체 조건’이라고 정의하고, 그에 대응하는 담론을 생산해왔다.


1-1. 매체와 미디어의 이분법

오늘날 매체(medium/media)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닌 다의적이고 복합적인 단어이다. 한편으로 매체는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과 같은 매스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 회화, 조각, 영화와 같이 예술의 재료와 형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주술적 의미의 영매를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매체는 이러한 다양한 함의를 가진 하나의 단어이지만, 크라우스는 매체로 통칭되는 ‘매체(medium)’와 ‘미디어(media)’를 구분하면서, 자신의 논의가 ‘매체’에 관한 것이라고 선을 긋는다.2이러한 맥락에서 크라우스는 ‘medium’의 복수형으로 ‘mediums’를 사용한다. 즉 미적 매체와 예술 매체는 ‘medium’으로 표현하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media’로 표현하면서 이를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미적 매체와 기술 매체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medium’을 ‘매체’로, ‘media’를 ‘미디어’로 표기하고, 필요에 따라 영문을 병기한다. 해당 용어 구분에 관한 크라우스의 설명은 Rosalind E. Krauss, “A Voyage on the North Sea” Art in the Age of the Post-Medium Condition (New York: Themes &Hudson, 2000), 57 n. 4; Rosalind E. Krauss, Under Blue Cup (Cambridge: The MIT Press, 2011), 33 참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적 매체(aesthetic medium) 개념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미적 매체 개념은 장뤽 낭시가 단수적 복수로 여긴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낭시는 단수 명사 ‘예술(Art)’의 힘을 각각 다른 뮤즈(muse)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복수의 미적 지지체들로 분산하고자 하였다.3 Krauss, Under Blue Cup, 2.

여기서 미적 매체란 예술 장르의 수단이나 재료로서 각 장르의 정의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매체를 가리킨다. 즉 예술 매체(artistic medium)가 예술작품의 재료로서 매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미적 매체는 그중에서도 그 재료가 예술의 양식과 성질을 규정하는 매체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회화라는 예술 장르의 매체는 캔버스 등의 평면과 물감이다. 이때 평면과 물감의 사용이 회화라는 예술 장르에 독점적으로 사용되면서 회화의 정의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매체는 미적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적 매체는 곧 예술의 매체로서 예술 장르의 정의와 일치한다.4 그러므로 예술 매체가 예술작품의 재료로서 매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미적 매체는 그중에서도 그 재료가 예술의 양식과 성질을 규정하는 매체를 가리킨다. 기술 매체도 예술 매체가 될 수도 있지만(예컨대 미디어 아트), 미적 매체는 그 자체로 예술 규정이 되는 매체를 의미한다. 크라우스는 이처럼 ‘예술’이라는 개념을 구성하고 있는 회화, 조각 등의 장르를 규정해주는 미적 매체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에 비해, 기술 매체(technological media)는 테크놀로지 발전의 산물로서 미적 매체와는 상이한 개념과 구조를 갖는 개념이다. 기술과 결합한 의사소통 수단을 매체로 보는 기술 매체 개념은 19세기 들어서 테크놀로지적으로 기능이 전환된 언어가 매체 개념의 전형이 되면서 등장한다. 나아가 20세기에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의사소통 매체들이 다량으로 등장하여 기술 매체 개념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매체가 등장하고 보편화되면서 기술 매체 개념이 매체 개념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기술 매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미디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즉 ‘매체(medium)’의 복수형으로서 ‘미디어(media)’가 단수형으로 사용되면서 대중문화와 관련된 기술 매체들을 가리키기 시작한다.5 20세기부터 ‘미디어’가 독자적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그중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20세기 중반에 신문과 방송이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 되면서 ‘미디어’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게 쓰이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1950년대부터 미디어는 그것의 급속한 대중화와 함께 자주 단수로 사용되었다.” (Raymond Williams, Keywords,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203-204) 그리고 이러한 집합적 단수명사 ‘미디어’를 주제로 삼는 미디어 연구가 등장하게 된다. 이들 미디어 연구는 집합명사 ‘미디어’를 사용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개별 매체의 특정성에는 관심이 없다. ‘미디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내용을 전달하는 광범위한 기술의 총체다. 이것은 하나의 완결된 독립적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체계와 같다. 예컨대 미디어 연구는 신문이라는 매체를 하나의 독립적 대상으로서 고유한 성질이나 형식, 관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광범위한 의사소통의 체계로 본다. 그에 따라 미디어 연구는 대중매체로서 매체의 사회적 효과 등 매체 일반이 형성하는 환경을 연구한다. 이러한 미디어 연구의 발전은 미술 담론에도 영향을 미쳐, 전자매체를 이용하는 예술작품에 관한 담론과 비평은 제한된 분과로서 미술사의 담론보다 미디어 연구를 적극 참조하였고, 매체 특정성에 기반한 예술매체 논의는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크라우스는 20세기 후반부터 예술에서 회화와 조각 같은 전통적인 미적 매체가 유효성을 상실하고, 전통적인 미적 매체에서 벗어난 다양한 매체가 예술의 매체로 사용되는 상황을 ‘포스트매체 조건’이라고 정의한다. 즉 포스트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을 거치면서 다양한 사물이 예술 오브제로 사용되고, 사진, 영화, 비디오 같은 기술 매체를 사용하는 예술작품이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게 된 상황, 그리하여 회화 아니면 조각이 예술이던 시대를 벗어나 더 이상 예술이 자신의 매체로 자신을 정의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예술의 매체가 변화하였다는 것을 넘어서서 예술의 규정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매체 특정성을 토대로 한 예술의 자율성 개념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모든 매체를 예술 매체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매체의 특정적 속성과 예술을 동일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2. ‘텍스트’로서 미술에 대한 비판

이처럼 예술이 전통적인 미적 매체에서 벗어난 상황은 단지 매체가 변화한 것의 문제를 넘어서서 매체 자체에 대한 관심이 소멸하는 상황으로 나아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설치미술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한 예술은 매체를 다루는 것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중점을 두면서 예술을 지속하고자 하였지만, 크라우스는 그것이 예술의 영역을 확보해주기보다 오히려 예술을 산업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크라우스는 1997년의 도큐멘타X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카트린 다비드의 감독으로 진행된 도큐멘타X은 “글로벌화된 오늘날의 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이슈들에 대해 비판적 평가”6 “Retrospective: Documenta X,” Documenta, accessed April 24, 2018, https://www.documenta.de/en/retrospective/documenta_x 를 제기하겠다고 밝히고, 그러한 주제에 부합하는 설치미술을 대거 선보인다. 도큐멘타X의 대표작 루이스 바인버거의 <식물 너머에는 그들이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북아프리카, 이스라엘, 시리아에서 가져온 식물들을 카셀 기차역 공원에 심어서 서로 다른 문화의 조화를 상징하였고, 가장 화제가 됐던 카르스텐 횔러와 로즈마리 트로켈의 <돼지와 사람을 위한 집>은 행사장 한가운데에 실제 돼지우리를 만들고 돼지를 가둬둠으로써 “대량 사육 시스템의 섬뜩한 현실”7Ibid.을 보여줬다. 무엇보다도 도큐멘타X은 관객이 카셀 기차역에 내려서 전시장에 이르기까지의 길 전체를 일종의 “영화 시퀀스”처럼 꾸미고, 관객은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작가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주제를 체험하도록 기획되었다.

크라우스는 이러한 기획이 개념미술을 따라서 “예술의 매체의 중심으로서 시각적인 것”을 “텍스트적인 것”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8 Krauss, Under Blue Cup, 59-62. 매체를 다루는 것으로서 예술의 역할을 그만두고, “정치적 도덕주의”에 빠져서 “텍스트 해석학”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적이었던 동구와의 서독의 근접성을 지겹게 반복하는 도큐멘타X의 설치미술의 강박적인 정치학은 바르트가 “정치적 도덕주의”라고 한 것의 예이다. 이러한 “정치적 도덕주의”는 더욱 최근에는 관계 미학의 “문화적 순응주의”에게 길을 내주고 있다. (…) 이것은 지속적인 텍스트 “해석학”이 아닌 무엇이 될 수 있는가?9 Ibid., 67.

크라우스는 설치미술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서 관계미학 또한 비판한다. 관계미학의 대표적인 예술가인 티라바니자는 미술관 안에서 관객에게 태국 음식을 나눠주는 것을 작품으로 선보임으로써 사회적 주제를 전달한다. 이러한 티라바니자의 작품은 미술관 안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일시적인 작은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부리요가 말하는 “교환의 장소”10 Bourriaud, Relational Aesthetics, 18.의 이상을 실현한다. 또한 뉴욕 중심지의 갤러리에서 태국음식을 나눠주는 것은 아르헨티나 태생의 태국인이라는 자신의 복잡하고 ‘글로벌한’ 정체성을 상기하게 하고 서양과 동양이 만나는 작은 공동체라는 다원주의적 주제를 전달한다. 이로써 티라바니자는 “[관계미학은] 독립적이고 사적인 공간보다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의 사회적 맥락을 이론적, 실천적 출발점으로 삼는다”11 Ibid., 113.는 관계미학의 테제를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그러나 티라바니자의 작품은 자신이 사용하는 매체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나누는 태국음식, 나눔이라는 방식, 관객의 참여와 같은 매체적 조건들에서 규칙을 찾아서 드러내는 일은 다루지 않는다. 그에게 나눔과 참여는 단지 일시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사회적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크라우스는 관계미학의 이러한 측면이 미술관을 “관조의 공간”에서 일시적 이벤트의 공간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실험장”으로 변형한다고 비판한다.12 Krauss, Under Blue Cup, 67. 관계미학 작품은 일종의 사회적 이벤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음식을 나눔으로써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회적 실천과 티라바니자의 작품은 구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미학은 “사회적인 것의 생기 넘치고 명랑한 모델”을 소환함으로써13 Ibid. 작품의 형식보다 정치적 주제를 앞세우고, 문화적 체험장의 역할을 자처한다.


1-3. 예술의 자율적 조건으로서 매체

크라우스가 설치미술을 이토록 경멸하는 까닭은 그것이 매체 특정성에 기반한 예술의 자율적 조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크라우스는 “현대예술의 거대 서사는 예술 실천에 힘을 부여하고 예술작품의 의미를 지탱해주는 것으로 이해되는 특정적 미적 매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14 Krauss, Perpetual Inventory, xiii.라고 말한다. 즉 모더니즘 예술은 각각의 미적 매체를 구분하고, 예술작품은 자신이 속한 매체의 특정성을 탐구함으로써 그 의미를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크라우스는 매체가 “자기규정의 재귀적 형식”15 Krauss, Under Blue Cup, 24.이라고 말한다. 매체가 예술의 자기반성의 토대로서 예술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산업의 감각적 체험과 다르게 예술은 매체라는 고유한 영역을 탐구함으로써 자기 완결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크라우스는 오늘날 포스트매체 조건에서도 “비평가로서 나는 의미의 지속적인 원천으로서 매체라는 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16 Krauss, Perpetual Inventory, 19.라고 말한다.

크라우스가 보기에 예술이 매체를 다루기를 포기하고 일종의 ‘텍스트’가 되면서, 예술과 산업 사이의 구분은 약화되고 자율적인 예술의 영역은 와해된다. 한편으로는 미디어의 범람으로 일상적 삶 속에서 감각적 체험을 빈번하게 경험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 스스로가 사회적 주제를 제시하는 데 몰두하면서 양자 사이의 구분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크라우스는 『북해에서의 항해』의 마지막 장에서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포스트매체 논의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는 먼저 프레드릭 제임슨을 인용하며 오늘날 일상적 삶에서 감각적 경험이 증가하는 상황을 지적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티를 광고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에 의해서든, 사이버공간에 의해서든 이미지에 의한 문화적 공간의 총체적인 포화로 특징짓는다. 그는 개별 예술작품이라는 관념을 완전히 문제시하고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공허하게 하는 문화가 팽창하는 상태에서, 사회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이 완벽한 이미지 침윤(image-permeation) 상태는 미적 경험이 이제 어디에나 있음을 뜻한다고 말한다. […] 여기에서 “후기자본주의의 지각 체계”는 쇼핑부터 모든 형태의 여가에 이르는 것들을 미적인 것으로 경험하고, 이로써 제대로 된 미적인 영역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쇠퇴하게 한다.17 Krauss, Voyage on the North Sea, 56.

오늘날에는 상업 광고, 대중매체의 이미지가 범람하면서 일상적 삶 속에서 감각적 경험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고, 그러한 것들을 미적인 것으로 경험함에 따라 “제대로 된 미적 영역”으로서 예술의 영역은 쇠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미적 매체를 다루는 것으로 고유한 역사를 가진 예술의 범주가 독자적인 영역으로 존재할 근거가 희박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예술이 미적인 것을 포기하고 내용이나 메시지를 앞세움으로써 스스로 “미적인 것이 사회 영역 일반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것을 모방”18 Ibid.하기도 한다고 크라우스는 지적한다. 이는 바로 포스트매체 조건의 예술 중에서 탈매체적 예술이 미적 매체의 탐구를 포기하면서 일상에서의 감각적 경험과 가까워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크라우스는 “자본에 봉사하여 이미지의 세계화와 공모하는,” 설치미술과 인터미디어 작품의 국제적 유행이 예술을 산업적인 것으로 변모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19 Ibid. 앞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 후반부터 설치미술류의 작업이 주류를 형성하고, 그것들을 선보이는 국제적인 예술 행사가 성행하면서 예술이 관광상품화 되는 경향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경향은 매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예술의 존재론을 확보한다.

크라우스는 이처럼 예술이 매체 탐구를 도외시하고 사회적인 것을 앞세우는 것이 결국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흐리고 예술을 산업적인 것의 감각적 체험으로 빠지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이처럼 예술과 산업적인 것이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은 오히려 예술이 산업에 봉사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크라우스는 설치미술이 화이트큐브를 비판하고자 사회적인 것을 도입하는 것이 최종적으로는 글로벌 시장 경제를 촉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술과 문화 일반의 구분을 무너뜨리면서 이를 비판하는 것은 결국 문화 일반과의 구분을 상실하면서 시장 경제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20 크라우스는 포스트매체의 전환기에 활동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제시했던 마르셀 브로타스의 통찰을 토대로, 순수예술의 상업성을 비판하는 제도비판이 결국 글로벌 미술시장을 촉진시킨다고 말한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브로타스는 예술작품을 “예술에 관한 이론”으로 제작함으로써 상업성에서 벗어나고자 한 개념미술이 결국 상업적인 것에 봉사하는 것으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예상하였다. “브로타스가 후기구조주의 이론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이론 자체에 대한 그의 깊은 양가성을 기억해야 한다. 그가 잡지 『인테르푼크티오넨』에서 이론들이 “[그것들이] 생산되는 질서를 위한 광고”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되거나 아마도 그렇게 드러나게 된다고 말한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 비판에 따르면, 모든 이론은, 그것이 비록 문화 산업을 비판하는 것일지라도, 바로 그 산업을 프로모션하는 형태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전복적 전용의 궁극적 주인은 자본주의 그 자체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브로타스는 […] 이론과 문화산업이 최종적으로는 공모를 하고, 제도비판은 궁극적으로 글로벌 마케팅의 바로 그 제도들로 흡수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였다.” (Krauss, Voyage on the North Sea, 20.) 그러므로 크라우스는 예술이 사회적인 것을 도입함으로써 상품이 되는 것을 비판하는 방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보다 예술은 사회로부터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크라우스의 입장이다. 그리고 그러한 거리는 예술이 자신만의 고유한 역할을 가짐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크라우스는 분리된 영역으로서 자율적 예술의 상징과도 같은 화이트큐브를 옹호한다. 이는 탈매체적 경향의 대표적 사례인 도큐멘타X이 화이트큐브를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비판한 것과 대조된다. 도큐멘타X은 미술관 외부와 내부를 분리시키는 화이트큐브가 예술을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고 주장하고, 나아가 이제는 정치적 서사를 전달할 수 있는 ‘블랙큐브’가 화이트큐브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1 “호텐지아[도큐멘타X의 총괄 어시스턴트]는 [도큐멘타10의 가이드를 위한 교육을] 이렇게 시작한다. “화이트큐브란 무엇인가요? 왜 큐브인가요? 왜 하얀색인가요? […] 그 어떤 ‘외부적’인 것도 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정치적인 것도, 이데올로기적인 것도, 신성한 것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왜 화이트큐브는 끝났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소진되고야 말았다면, 무엇이 이를 대체할까요?” […]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전도유망한 가이드가 답한다, “블랙 큐브?” […] “맞아요, 맞아요! 블랙큐브는 영화관이자, TV를 보기 위해 어둡게 한 방이고, 미디어의 공간입니다. 카트린 다비드는 ‘진정성이나 순수성, 또는 미술과 미디어 간의 강력한 존재론적 대립에 동의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모든 강렬한 미적 경험은 미디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Krauss, Under Blue Cup, 64) 그러나 크라우스는 매체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하얀 방으로서 화이트큐브는 매체의 탐구로서 예술의 영역을 확보해주는, 예술의 토대라고 말한다.


수영장의 벽이 우리가 다시 물속으로 나아갈 추진력을 얻기 위해 차고 나갈 수 있는 표면이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화이트큐브는 우리가 눈으로 만질 수 있는 토대다. […] 매체에 의해 생성되는 규칙이 우리로 하여금 화이트큐브의 저항적인 표면을 차고 나갈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우리가 화이트큐브를 왕궁의 방이 아니라 수영장으로 생각하도록 도와준다.22 Ibid., 86.

이때 크라우스는 화이트큐브가 신성하고 순수한 공간으로서 왕궁의 방이기보다는, 수영장의 벽처럼 예술이 추진력을 얻을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프레임이라고 주장한다. 공간을 어둡게 하고 관객을 영상에 집중하게 하는 영화관의 블랙큐브와 달리, 화이트큐브는 매체의 미적인 형식을 가시적으로 보이게 해줌으로써 예술이 자신의 고유한 역할로서 매체를 탐구하고 창안하는 것이 드러나게 만들어주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술관 외부와 내부를 구분해주는 벽으로서 화이트큐브는 예술을 외부의 현실과 구분해줌으로써 미적인 형식으로서 매체를 탐구하는 것으로서 예술의 고유한 영역을 만들어주는 울타리와 같다. 이러한 크라우스의 주장은 대중문화와 미디어가 모든 영역을 잠식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예술의 전통을 지속하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제공해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크라우스가 매체 탐구를 예술의 고유한 가치로 확보하면서도, 예술이 오직 매체 탐구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라우스는 매체를 포기하고 정치적 메시지만을 내세우는 작품은 비판하지만, 매체를 다루면서 사회적 함의를 지니거나 사회비판적 내용을 갖는 작품은 옹호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켄트리지의 작품이다. 켄트리지의 작품은 직접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스는 이 작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므로 크라우스가 주장하는 예술의 자율성은 전적으로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의 순수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크라우스의 논의에 입각하면 매체는 예술이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갖게 해줌으로써 예술에 정당한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지, 예술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크라우스가 말하는 예술의 고유성(혹은 자율성)이란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순수예술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 예술이 다른 어떤 분과와 다르게 가질 수 있는 역할로서, 예술의 전통을 지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크라우스가 주장하는 예술의 고유한 가치는 그린버그식 모더니즘의 매체 순수성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린버그가 예술이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 사회적 함의를 배제함으로써 예술을 순수하게 하려고 했다면, 크라우스는 예술이 매체를 통해 의미를 획득하고 고유한 역할을 가질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라우스에게 매체와 화이트큐브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예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 독자적 가치를 지닐 수 있게 도와주는 “수영장의 벽”이다.

그러므로 매체를 통해 예술의 존재론적 근거를 확보하는 크라우스의 주장은 사회비판적 내용을 지닌 예술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준다. 수영선수가 “수영장의 벽”을 차고 나가듯이, 예술은 매체를 잘 다룸으로써 오히려 예술의 사회적 참여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크라우스는 설치미술의 ‘정치적 도덕주의’23 Krauss, Under Blue Cup, 66-68.와 대립하면서 매체를 강조하기 때문에 예술의 사회적 비판적 의미를 강조하지 않지만, 그가 제안하는 예술의 공간은 오히려 그러한 의미를 지님으로써 더욱 큰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크라우스에게 ‘매체’는 예술의 고유한 역할을 만들어주고, 예술의 강력한 근거를 제공하는 ‘토대’이다. 그러한 토대로서 매체가 무너지는 상황에 대응하여 크라우스는 새로운 예술 매체 개념을 제시한다. 자신의 매체를 탐구하는 것으로서 예술의 전통을 되살리고, 이로써 예술 고유의 영역을 확보하여 산업적인 것과 구분하고자 하는 것이다.


2. 크라우스의 매체

이처럼 예술이 자신의 고유한 토대를 상실한 상황에서 크라우스는 다시 매체 개념을 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때 매체는 이미 한 차례 소진되어버린 그린버그식의 매체와 매체 특정성이 아니다. 크라우스는 변화한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매체 개념을 제시한다.

크라우스는 매체를 대상의 물질적 속성으로 이해하는 매체 개념에서 벗어나 매체를 지지체와 규칙의 결합으로 이해한다. 즉 매체는 “주어진 기술적 지지체의 재료적 조건에서 도출되지만 그 조건과 동일하지는 않은 일련의 관습들, 투사적(projective)이면서 기억적인(mnemonic) 표현의 형식들을 전개시키면서 나오는 관습들”24 Rosalind E. Krauss, “Reinventing the Medium”, Critical Inquiry 25, no.2 (Winter 1999): 296.을 포함하는 것이다. 예컨대 회화의 경우, 그린버그는 회화의 매체를 평면으로서 캔버스와 그 위에 덧붙여지는 물감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물질적 요소로부터 매체의 특정성, 즉 평면성이 도출된다. 그 결과 회화는 자신의 매체에 대한 탐구를 거듭하면서 점차 평면으로 환원되게 된다. 반면 크라우스는 회화의 매체를 단지 물질적 요소로 이해하는 대신에 그 물질적 요소(지지체)에서 도출되는 규칙을 포괄하여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회화라는 매체는 캔버스와 물감을 다루는 수많은 규칙, 즉 역사적 관습을 포괄하여 이해된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 큐비즘 회화의 기법 등 여러 규칙을 포괄하여 회화라는 매체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라우스의 매체 개념은 그 모든 규칙을 포괄하는 자기분화적(self-differing)인 개념이다.

그러나 포스트매체의 시대는 회화와 같은 전통적인 미적 매체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예술가들은 이미 다양한 사물들—애니메이션 필름, 자동차, 슬라이드 영사기 같은 것들을 예술의 매체로 사용하였다. 크라우스는 이러한 지지체들을 ‘기술적 지지체(technical support)’로 정의하고, 이것들이 전통적인 예술 지지체를 대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크라우스는 포스트매체 조건에서는 전통적 미적 매체가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술이 새로운 기술적 지지체를 포용한다.25 크라우스는 기술적 지지체가 ‘망각’과 ‘비망각’의 결합이라고 말하면서, 이때 망각은 “소진된 매체(이를테면 유화)를 망각해야 하는 필요성”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포스트매체 조건에서 전통적 매체는 유효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Krauss, Under Blue Cup, 128.

또한 기술적 지지체는 “작품의 물리적 지지체의 단순하고 단일한 규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새로운 기술의 겹쳐진 메커니즘”26 Rosalind E. Krauss, “Two Moments from the Post-Medium Condition,” October 116 (Spring 2006): 56. 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영화의 지지체가 셀룰로이드 스트립이나 스크린, 영사기의 빛 등 영화의 여러 구성 요소 중 하나로 단일하게 규정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모든 요소를 영화의 기술적 지지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 지지체의 결합으로서 포스트매체 시대의 매체는 이들 지지체의 겹쳐진 메커니즘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크라우스가 주장하는 포스트매체 조건의 예술 매체는 전통적 매체처럼 단일하고 단순한 것이 아니다. 크라우스는 여러 매체가 결합하여 복합적이고 혼합적인 매체, 즉 복수의 지지체에 의해 구성되는 복합 구조(complex structure)를 가진 매체를 지지한다.27 “루셰이, 콜먼, 켄트리지, 세라에 의해 이해되는 규칙들은 […] 그들의 작품의 지지체의 복합체 안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Krauss, Under Blue Cup, 87) “그러므로 특정성이야말로 콜먼이 그의 ‘영사된 이미지’의 복합 구조를 만들면서 고려한 점이다.”(Ibid., 94)

따라서 크라우스가 주장하는 포스트매체 조건에서의 예술 매체는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 사진의 형태에 안주하지 않으며, 여러 요소의 결합으로 하나의 매체를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크라우스는 형식의 측면에서는 혼합적인 작품 형식을 포용하며, 흔히 ‘설치 작가’라고 분류되는 작가의 작품도 매체의 관점에서 독해한다. 예컨대 제임스 콜먼의 <이니셜들>은 사진, 슬라이드 영사기, 영사기의 빛, 내레이션이 나오는 사운드 트랙, 영사기가 내는 소리 등이 정교하게 결합되어 하나의 매체가 된다. 콜먼이 매우 정교하게 여러 매체를 혼합하여 설치하는 것을 크라우스는 긍정하면서, 그것이 오히려 그가 매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평가한다.28 크라우스는 콜먼의 작품에서 복합적인 이미지와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장치가 얼마나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콜먼은 자신의 ‘원본’의 조심스럽게 조정된 디스플레이 외에 순환하면서 전시되기 위한, 작업의 다른 버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콜먼의 작품은 세계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면서 다시 설치되는 설치미술과는 다른 차원에 있으며, 콜먼의 작품이 지니는 매체의 복잡한 구조에서 매체 특정성에 대한 그의 관심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Krauss, Under Blue Cup, 90, 93)

그런데 이러한 복합 구조의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은 기존의 매체에 안주하지 않는 것인 동시에, 기존의 매체와의 관련성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기술적 지지체를 사용하는 작품들은 올드 미디엄(old medium)과 모종의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콜먼의 경우, 슬라이드 영사기를 기술적 지지체로 이용하지만, 사진이라는 이미 공인된 예술 매체를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크라우스는 예술가가 새로운 기술적 지지체를 도입하는 것을 예술 매체로 간주하는 것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한다. 이 새로운 복합 구조의 매체가 예술 매체인 것은 단지 ‘예술가에 의해’ 그 기술적 지지체가 사용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복합 구조 안에 예술 매체가 이미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크라우스는 새로운 기술적 지지체를 도입하는 예술작품을 특정적 매체에 기반한 예술의 전통에 편입시킨다.

크라우스는 이러한 새로운 기술적 지지체의 규칙을 발견하고 확립함으로써 새로운 매체가 ‘창안(invent)’된다고 설명한다.29 “새로운 기술적 지지체의 관습들을 발견한 예술가는 매체를 ‘창안’했다고 할 수 있다.” (Ibid., 19) 즉 기술적 지지체에서 도출되는 규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미적 표현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새로운 예술 매체를 창안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언어를 만드는 것처럼 기술적 지지체의 문법과 통사구조, 수사를 확립하는 것이기도 하다.30 “매체를 창안하는 것은 언어를 창안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매체에 관한 일이 문법, 통사구조, 수사 같은 것을 갖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의 사용에서 역량으로 간주되는 것을 결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Krauss, “And Then Turn Away,” 6) 그러므로 포스트매체 조건의 예술가는 전통적 매체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다양한 사물을 기술적 지지체로 사용하고, 그 규칙을 발견하고 확립함으로써 새로운 매체를 창안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윌리엄 켄트리지는 애니메이션 필름, 에드 루셰이는 자동차, 제임스 콜먼은 슬라이드 영사기의 규칙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매체를 창안했다고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켄트리지는 애니메이션 필름과 드로잉을 지지체로 삼아 그 규칙을 드러낸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의 비극을 주제로 다루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여러 편 발표하였다. 그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종이 위에 차콜이나 파스텔 등으로 그린 드로잉을 필름으로 촬영한 것으로, 하나의 장면 당 하나의 드로잉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켄트리지는 계속해서 그림을 지우고 덧그리면서 장면을 완성한다. 즉 한 장의 드로잉을 16mm(또는 35mm)의 필름으로 촬영하고 일부 선을 지우고 덧그린 뒤에 다시 촬영하는 것을 반복하여 하나의 장면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성된 애니메이션에는 필름의 프레임이 바뀔 때마다 항상 앞선 프레임의 선이 지워진 흔적이 마치 잔상처럼 남는다. 크라우스는 바로 이 점에서 켄트리지가 ‘지우기(erasure)’라는 규칙을 통해서 분할된 프레임의 연속으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애니메이션 필름이라는 매체의 특정적 성질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켄트리지는 일련의 규칙을 창안한 또 다른 예술가이다. 그의 기법은 지우기다. 모든 선은 소멸의 잠재적 흔적이고, 수정될 자국이며, 각각의 수정은 필름의 프레임으로 기록된다. 이 프레임들은 만화영화의 동적인 움직임(animated movement)을 생산하기 위해 프로젝터에서 결합된다.31 Krauss, Under Blue Cup, 84.

즉 켄트리지는 이전 프레임의 선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자신이 사용하는 매체의 규칙을 숨기거나 간과하지 않고 드러내어 지시한다는 것이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이처럼 켄트리지는 기술적 지지체로서 애니메이션 필름과 드로잉의 규칙을 확립함으로써 새로운 매체를 창안한다.

크라우스가 제시하는 사례 중에 특히 눈여겨볼 만한 것은 소피 칼이다.32 Krauss, Under Blue Cup, 107. 크라우스는 소피 칼의 작품의 기술적 지지체가 신문 보도의 한 장르인 탐사보도(investigative journalism)라고 주장한다. 칼은 <미행>(1981), <전화번호 수첩>(1983) 등의 작품에서 탐사보도의 형식을 통해 미지의 인물을 찾는 과정을 드러낸다. <전화번호 수첩>에서 칼은 길에서 주운 전화번호 수첩의 주인을 추적하기 위해 그 수첩에 적힌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매일 실었다. 칼은 수첩의 주인에 대한 타인들의 설명을 통해서 미지의 인물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크라우스는 이처럼 칼이 탐사보도라는 형식을 기술적 지지체로 사용하고 그 관습과 규칙을 발견하여 자신의 작품에서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매체를 창안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크라우스에 따르면 매체는 단지 물리적인 지지체만이 아니라 기술적 지지체와 그것에서 도출된 규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3. 주제 비평을 넘어서 – 미술을 다르게 보기

이러한 크라우스의 매체 논의의 확장은 오늘날 포스트매체 조건에서 여러 매체를 결합하여 예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는 예술가들의 작업을 이해할 실마리를 마련해준다. 특히 어떤 작품들은 주제나 내용으로 접근하는 기존의 비평 경향에서 벗어나 크라우스의 매체 개념으로 접근함으로써 더욱 풍부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크라우스의 논의에서 드러나듯이, 포스트매체 상황의 모든 예술작품이 매체를 다루는 데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크라우스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예술가들을 포함하여 매체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그동안 미적 매체에 관한 담론이 부재함에 따라 예술비평은 이 작품들에서 매체의 측면을 간과하고 주제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예컨대 켄트리지의 작품은 포스트식민주의 담론 등을 통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적 상황을 다루는 작품이라는 해석에 치중되어 왔다. 그의 작품에서 정치적 문제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그러한 주제만을 다루는 것은 그의 작품의 매체적 측면을 간과할 뿐만 아니라 같은 문제를 다루는 정치적 다큐멘터리와의 차별성을 부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크라우스는 켄트리지의 작품을 매체의 측면에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더욱 다양한 비평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즉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논의는 예술비평에서 낡은 개념으로 치부되던 매체를 되살림으로써 주제의 측면에서만 비평되던 작품을 매체 측면에서 비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크라우스의 매체 개념이 작품을 훨씬 풍부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또 다른 사례는 콜먼이다. 아일랜드 출신인 콜먼의 작품은 많은 경우에 유럽의 변방으로서 아일랜드적인 정서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비평되곤 하였다. 콜먼의 <이니셜>은 그 배경이 더블린 외곽에 있는 폐쇄된 폐결핵 병원이고, 내레이션으로는 아일랜드의 문학작품, 텔레비전 드라마 등을 인용하고 아일랜드의 기근이나 인구감소 등을 언급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줄곧 콜먼의 지리적 정체성과 함께 ‘아일랜드적인 것’으로 비평되어 왔다.33 콜먼의 작품을 아일랜드의 문화적, 역사적 참조로 논의하고, 아일랜드의 문화적 정체성에 복무하는 것으로 해석한 사례는 아주 많다. 크라우스가 언급한 사례 중 일부를 재인용한다. Jean Fisher, James Coleman: The Enigma of the Hero in the Work of James Coleman (Derry: Orchard Gallery, 1983); Anne Rorimer, “James Coleman: 1970-1975,” in James Coleman: Selected Works (London and Chicago: The Renaissance Society at the University of Chicago and the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London, 1985); Michael Newman, “Allegories of the Subject: The Theme of Identity in the Work of James Coleman,” in James Coleman: Selected Works; Luke Gibbons, “Narratives of No Return: James Coleman’s Guaire,” Artforum (December 1993): 50-51, 101. (Krauss, “And Then Turn Away,” 9 note 3) 카트린 다비드 또한 이러한 측면에서 콜먼의 작품에 주목하고 이를 도큐멘타X의 참여작으로 선보였다.34 다비드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주체성이 아니라 사회적, 인종적, 젠더적 프로토콜이 우리가 맡는 역할을 생산한다는 관점에 입각하여, 콜먼의 작품이 그러한 사회적 구축의 과정과 각 개인이 그러한 사회적 역할을 요구받는 방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Krauss, Under Blue Cup, 80. 다비드는 인간의 주체성이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는 해체주의의 입장에 입각하여 콜먼의 작품을 비평한다. 그러나 크라우스는 콜먼의 작품에 매체적으로 접근함으로써 그동안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다른 요소에 주목한다. 크라우스는 콜먼의 사진 속 인물들이 만드는 “기이한 코레오그래피”35 Ibid. 에서 사진소설과 만화의 관습을 발견하고, 그러한 콜먼의 매체가 얼마나 탁월하게 미적 매체의 전통을 기억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이러한 크라우스의 독해는 콜먼의 작품을 단지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독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그 작품에 훨씬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크라우스의 매체 개념은 크라우스가 사례로 제시하고 있는 예술작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 지지체와 규칙을 토대로 특정성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면 모두 크라우스의 매체 개념을 참조하여 독해할 수 있다. 즉 그 작품이 자신의 지지체와 그로부터 도출되는 규칙을 인지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면 모두 가능하다. 그러므로 크라우스의 매체 개념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동시대 예술 실천을 이해할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결국 크라우스의 논의는 미디어가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독자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서 예술이 오래된 매체부터 새롭게 등장한 기술 매체까지 다양한 매체를 탐구하고 미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라우스는 미학적 측면에서 모더니즘적 태도를 취하고 자율적 예술의 영역을 고수하지만 포스트매체 조건으로서 현재 시점에 다양한 매체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을 수용한다. 이러한 크라우스의 논의를 보다 확장시킨다면 지속적으로 최신 매체가 유입되는 동시대 예술의 매체를 이해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 한국미술의 담론적 장에서 크라우스의 매체론은 ‘포스트미디어’ 이론과 비교되면서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동시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데 치우쳐져 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 이후 전통적인 매체 개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작업들을 다루기 위해 크라우스의 이론이 자주 ‘인용’된다. 물론 크라우스의 매체론이 다양한 매체에 개방적이기 때문에 디지털 매체 예술을 이해하는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디지털 매체가 갖는 분열적이고 유동적인 특징을 특정성으로 상정하고 이를 드러냄으로써 특정적 작품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크라우스의 이론은 크라우스 본인이 단언하듯이 디지털 매체를 설명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닐 뿐더러,36 일례로 크라우스는 포스트매체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는 강연(Castello di Rivoli Museo d’Arte Contemporanea, 2017.6.21.)에서, 디지털 예술에 대해 질문하는 관객에게 “디지털 예술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에 관해서는 내가 너무 무지하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https://youtu.be/2d_ABuodJlQ 이러한 경향은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이론을 하나의 방향으로 사용하는 형국이다.

그보다 크라우스의 대안적 매체 개념이 기술적 지지체와 규칙을 매체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극적으로 ‘규칙’을 제안하고 실천하고 변형하는 작업들을 들여다볼 때 동시대 미술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다른 측면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 주제나 소재, 입장을 위주로 작품에 접근하던 것에서 벗어나 작품의 매체로서 규칙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화연의 최근 작품은 대상의 변주를 마치 하나의 규칙처럼 이용한다. 남화연의 <약동하는 춤>(2017)은 1983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플래시 댄스>에 등장하는 안무를 북한식으로 번안한 왕재산 경음악단의 안무를 소재로 한다. 아이린 카라의 ‘What a Feeling’에 맞춰 춤을 추는 여성이 1980년대 미국에서는 여성 개인의 꿈과 성취를 보여준다면, 북한에서는 같은 음악의 안무가 체제의 선전을 위한 또 다른 군무로 변주되면서 특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작가는 이 안무를 다시 동시대 한국의 안무가에게 전달하여, 안무가가 다시 이를 편집·재구성하여 새로운 안무로 창작하게 한다. 그렇게 탄생한 안무는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습실 배경의 케이팝 커버 댄스처럼 보인다. 그렇게 ‘What a Feeling’의 안무는 다시 2010년대 한국에서 시스템 내에서 하나의 사다리로서 여성의 춤으로 변주된다.

같은 해 시청각에서 전시한 <임진가와>에서도 그러한 협업과 변주가 일어난다. 재일동포 사이에서 ‘아리랑’처럼 불리는 노래 ‘임진강’은 1950년대 말에 북한에서 발표되었고, 1960년대에 일본에서 밴드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에 의해 번역되어 불리면서 큰 인기를 끈다. 남화연의 <임진가와>는 이러한 노래의 역사를 다큐멘터리로 추적하면서, 노래를 매개 삼아 재일조선인의 개인적 기억과 역사를 소환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이 노래는 동시대 한국의 음악가에 의해 편집·재구성되어 또 다시 변주되어 불린다. 그렇게 북한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가요 ‘임진강’은 이랑의 ‘임진강’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재일동포의 애환이 담긴 노래가 동시대 가수의 음색과 창법으로 변주되어 불릴 때, 그 음악은 같으면서도 다른 노래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임진가와>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미술’이 된다. 작가는 단지 어떤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소재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새롭게 변주되는 과정을 규칙으로 삼고 그 과정을 작가가 기획, 조정, 편집하여 제시한다. 남화연의 작업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 규칙의 층위, 즉 작가가 마치 언어를 구성하듯이 만들어낸 규칙을 고려할 때, 남화연은 크라우스가 말하는 여전히 예술의 규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의 조건을 충족한다.

남화연의 작업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서 나아가 그가 그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 즉 자신의 매체를 다루는 방식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의 작업을 보는 또 다른 통로가 될 것이다. 예술 비평에서 매체에 대한 독해가 한계에 이르고 주제에 대한 비평이 과잉된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의 독해는 동시대 작품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해준다.


4. 문학의 매체를 새롭게 상상하기

한편, 비록 동시대 미술에서 매체에 관한 논의가 줄어들었다할지라도, 미술은 늘 매체를 중심으로 발전해왔고, 그 역사는 꽤 명확하게 서술이 가능하다. 그에 비해, 문학에서 매체에 대한 논의는 다소 한정적이다. 문학의 매체는 언어로 이해되어 왔고, 매체로서 언어에 대한 탐구는 줄곧 물리적 대상으로서 언어 자체를 다루는 것으로 상상되어 왔다. 문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방가르드 시는 단어의 의미를 배제하고 언어의 모양과 소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문학의 매체를 탐구하였고, 소설의 경우에도 조르주 페렉이나 W. G. 제발트 같이 형식면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룬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예외적 성취는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작가들이 또 다른 종류의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누가 페렉의 형식 실험에 비평적으로 대응하면서도 한 차원 더 나아간 소설을 썼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그 결과 오늘날 문학의 비평은 개별 작품의 주제를 다루는 데 치중되어 있고, 그에 비해 문학의 형식과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진척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학가들은 언제나 문학의 형식을 혁신하고 싶어한다.


“형태의 안을 바꾸고 채워넣어봐야 도긴개긴이다. 중요한 건 형태를 바꾸는 일이다. 그러니까 빚을 갚기 위해 돈 벌 방법을 계속해서 구상하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빚의 사회적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어떤 내용의 소설을 쓰느냐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것의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지돈씨?” 37금정연, 정지돈, 『문학의 기쁨』, 2017, 158-159.

이처럼 문학의 형식을 혁신하고자 하는 여러 의지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 매체에 관한 논의는 (미술에 비해) 획기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주어진 물리적 대상으로서 형태를 변형하는 실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식의 매체 탐구가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물질성으로 환원되어 고갈되어버린 것처럼, 내용을 감싸고 있는 형태만을 연마하는 것은 텍스트의 물질성 자체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다면, 마치 크라우스가 미술의 매체를 물리적 대상에서 그것의 관습과 규칙으로 확장한 것처럼 문학의 매체를 확장한다면 어떨까? 단지 물리적 대상으로서 텍스트가 아니라 내용의 관습과 규칙으로 문학의 매체를 확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문학의 오랜 주제 중의 하나로서 ‘여정의 서사’를 떠올려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부터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같은 미국적 여정 서사, 혹은 <삼포 가는 길> 같은 한국적 여정 서사에 이르기까지 길을 떠나면서 진행되는 서사는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한 ‘서사 형식’이 어떻게 발전하고, 오늘날의 작품에서 어떻게 새롭게 전개되는지 그 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이다. 소설의 매체를 실험하기 위해 소설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형태, 즉 매체로 이해하는 것으로 매체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역사와 전통이 문학사에 기입된 정전의 계보에 한정될 이유는 없다. 크라우스의 매체가 잊혀진 과거의 기억을 ‘불현 듯’ 현재에 떠올리는 것이듯이, 문학의 역사와 전통은 정통한 계보에서 벗어난 잊혀진 것일 수 있다. 소위 ‘순문학’에 속하지 못했던 수많은 문학이 문학의 전통으로 기억될 수 있다. 최근 한국문학에 종종 등장하는 재난상황은 본래 SF소설과 영화의 단골 ‘서사 형식’이다. 모두가 사라진 세계에 남은 두 소년소녀의 이야기인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 전염성 바이러스를 피해 피난을 떠나는 길에 사랑에 빠지는 두 소녀의 이야기인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 같은 작품은 장르소설에서 직선으로 내려오는 계보에 있지는 않을지라도, 재난과 고립이라는 ‘서사 형식’의 전통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들 작품은 그 전통의 관습과 규칙을 반영하고, 나아가 그 규칙을 새롭게 창안함으로써 또 다른 성취를 이루거나 이루지 못한다.

소설은 결국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의 방법론이 문학의 비평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학의 형식의 재료로서 매체에 대한 개념을 바꿈으로써, 즉 문학의 내용을 매체로 이해함으로써, 문학 비평은 개별 작품론의 비평에서 나아가 문학의 매체에 대한 방법론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로써 문학 비평은 “지속적인 텍스트 해석학”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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