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하자즈
《다가올 것들에 대한 취향》
A taste of things to come
바라캇컨템포러리, 2020.8.5. – 9.27.
*아트인컬처 2020년 9월호 게재
간이의자, 혹은 오토바이에 앉은 모델들의 표정이 자신만만하다. 더 보여주겠다는 것도, 덜 보여주겠다는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표정은 여유롭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땡땡이 무늬와 요란스러운 줄무늬, 가짜 루이비통 패턴이 뒤섞이고, 굵은 팔찌와 반지, 싸구려 플라스틱 선글라스가 더해지면서 ‘모로칸 스웩(swag)’이 완성된다. 관객은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저절로 움직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분위기에 빠져든다.
모로코에서 태어났지만 10대에 영국으로 이주했고 다시 영국과 모로코를 오가며 활동하는 하산 하자즈의 작품은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발전했다. 하자즈는 1970년대 후반부터 런던의 비주류 예술씬에서 활동하면서 음악, 패션, 사진 등 여러 방면의 작업을 진행했다. 지금처럼 스트리트 패션이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지 않은 시기부터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구축해왔고, 이후 1990년대부터 다시 모로코를 오가면서 모로코 문화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차용하는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경계를 가로질러온 그의 삶처럼 그의 작품은 어떤 경계들을 하나하나, 마치 그것이 그토록 견고하다고 생각한 태도가 우습다는 듯이 손쉽게 무너뜨려버린다.
화려한 패턴이 나를 감싸네
층고가 높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전시장 바닥과 벽을 메운 화려한 패턴에 눈길을 빼앗긴다. 대담하고 강렬한 색이 시선을 분산시킨다. 모로코의 전통적인 모자이크와 타일을 따와서 만든 패턴이 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눈에 이국적으로 다가온다. 아랍어로 적힌 교통 표지판의 문구 ‘정지’의 철자를 뒤집어서 ‘깨어나라’라고 적은 패턴은 가볍고 무해한, 유쾌한 농담으로서 전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단 미술 전시장이라면 배경은 단색이어야 한다. 화이트 또는 어두운 단색으로 배경을 칠해야 벽에 걸린 작품에 시선이 집중된다. 그러나 하자즈의 배경(그것은 비유적 의미로 ‘작품’이기도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벽을 메우는 배경이다)은 작품에 시선이 집중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얀 벽 위에 동동 뜬 채로 스팟 조명을 받는 작품에 집중하는 대신 바닥부터 높은 벽까지 공간 전체를 감싸고 있는 바이브를 느끼길 권한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목을 끄덕이고 발을 움직이며 박자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자즈의 공간은 음악이 없이도 시각적인 것으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현란하고 독특한 분위기는 떠들썩한 모로코의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그렇게 공간을 가득 메운 화려한 패턴은 작품과 배경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한다. 사진 속 인물들은 프레임이라는 분리된 공간 안에 한정되는 대신에 프레임이 없는 전시장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경계를 희미하게 하는 것은 단지 배경만은 아니다.
하자즈는 자신의 사진을 평범한 액자 안에 가두기를 거부하고 오브제를 결합하여 자신이 직접 제작한 프레임에 놓는다. 통조림 깡통, 성냥갑, 폐타이어 등 흔하고 평범하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가 드러나는 오브제로 구성된 프레임은 사진을 담는 하나의 틀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올리브 통조림 깡통으로 둘러싸인 사진은 마치 집안의 잡동사니가 올라가 있는 선반 위에 올려있는 가족사진처럼 자연스럽게 공간에 흡수된다. 그러므로 그의 프레임은 작품과 작품 바깥을 구분 짓는 경계가 아니라 작품과 작품 바깥을 이어주는 이음매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대신에 작품이 자연스럽게 배경 안에 머물 수 있게 한다. 경계가 무화된 작품은 전시장 전체의 분위기에 스며든다.
모로코 짝퉁이 런던 힙으로
이번 전시의 메인이 되는 <My Rockstars> 연작은 하자즈의 트레이드마크인 간이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하자즈는 십여 년에 걸쳐 마라케시, 런던, 파리 등의 거리에서 간이 스튜디오를 열고 인물 사진을 찍었다. 모로코 전통 패턴을 변형한 카펫을 배경 삼아 벽에 걸면 완성되는 간이 스튜디오에서 일상의 소음, 시선, 분위기를 열어둔 채 인물을 찍는다.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나오는 인물의 표정과 포즈, 제스처는 현장의 느낌뿐 아니라 인물 본연의 스타일을 그대로 전달한다. 사진 속 인물은 밸리댄서부터 무술연구가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중에서도 요리사이면서 제품 디자인도 하고 사회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 셰프 콜렉티브 게토 가스트로(Ghetto Gastro)처럼 하나의 주어진 단어로 직업을 정의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그 자체로 하자즈의 예술관을 보여준다. 화려한 패턴으로 꾸며진 하자즈의 사진 안에서 대중매체의 스타와 유명하지 않은 예술가는 나란히 놓인다. 그야말로 자신의 개성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사회가 정한 구분에서 벗어나 각자의 재능으로 빛난다.
하자즈의 또 다른 대표작 <Kesh Angeles> 연작은 마라케시의 여성들을 찍은 사진이다. 여성들은 오토바이에 앉거나 옆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토바이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마라케시에서 오토바이는 좁은 골목을 이동하기 위한 필수 교통수단이다. 마라케시에서는 흔하고 일상적인 교통수단일 뿐이지만 그 문화 바깥의 이들에게 대담한 자세로 오토바이에 앉아 있는 여성들은 다른 의미로 이해되곤 한다. 게다가 가짜 루이비통을 걸치고 화려한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으니 미국 영화에서 보던 갱스터는 아닐까 하고 착각하기 쉽다. 사실 가짜 루이비통 제품은 모조품 공장이 많은 모로코에서 아주 흔한 물건이라고 한다. 일상의 공간에서 익숙한 사물과 함께 있는 그들을 우리는 우리의 선입견에 따라 바라본다. 사진 속 여성들의 냉소적 포즈와 강렬한 눈빛은 그러한 문화적 편견에 맞서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과 함께 전시의 다른 한 축을 구성하는 것은 기성품을 차용한 오브제다. 하자즈는 통조림통, 홍차 틴케이스, 소스병, 음료수 깡통, 유리병 등 자신이 디자인하거나 기성품을 가져온 오브제를 재료로 작업한다. 모로코의 일상적 물건을 수집해서 꾸민 <Buy My Shelf>는 상업 제품의 디자인을 장식으로 활용하면서 모로코 문화의 한 면을 보여준다. 먹고 난 깡통을 다른 수납 용기로 쓰거나 플라스틱 운반상자를 의자로 쓰는 등 다 쓴 제품을 재활용하는 모로코의 흔한 생활 방식이 하자즈 작품의 방법론이 된 것이다. 요즘 서울의 트렌디한 레스토랑에서 빈 와인병을 다시 물병으로 쓰거나 플라스틱 운반상자로 만든 캠핑용품이 비싸게 팔리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다 쓴 물건을 다시 쓰는 것이 어딘가에서는 일상이고, 어딘가에서는 멋이 된다. 하자즈의 작품은 결국 그러한 문화적 맥락이 혼합하고 변주하는 곳, 서로 다른 맥락이 맞서고 융합하는 장 안에 있다.
분위기로 존재하는 것
이처럼 모로코의 평범한, 그 지역의 클리셰로 가득한 것은 하자즈의 작품에서 새로운 맥락을 갖게 된다. 모로코와 런던 혹은 서울의 문화적 거리는 명품 모조품과 싸구려 플라스틱 선글라스, 촌스러운 공장제 통조림 패키지를 한순간에 ‘힙’으로 만든다. 하자즈는 다른 특별한 멋을 부린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의 모습을 보여준 것을 멋으로 바꿔낸다. 여기에서 화려한 고급문화의 취향과 싸구려 기성품의 취향의 차이는 불분명해진다.
전시장 한편에는 하자즈가 운영하는 부티크 숍을 재현하여 그의 작품을 판매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가짜 루이비통 패턴으로 만든 모로코 전통 신발 바부슈, 기성품의 패키지를 닮은 틴케이스, 깡통을 재활용해 만든 랜턴, 모로코 전통 의상을 입은 바비 인형 등이 판매된다. 관객들은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듯이 그의 옷과 신발, 가방을 입어보고 들어본다. 하자즈가 디자인한 바부슈는 예술품일까 상품일까? 이러한 질문 자체가 우습다는 듯이 그의 작업은 경계를 넘나들고 한 영역에 있던 것을 다른 영역으로 옮기고 섞는다. 미술과 상품의 구분, 고급문화와 하위문화의 구분,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의 구분을 벗어나서 모든 카테고리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의 작업은 기존의 사회적 인식과 관념을 재고하게 만든다. 스트리트 패션이 하이패션에 차용되는 시대, 하위문화의 요소가 그대로 미술이 되는 시대에 새로운 취향은 이전의 경계를 따르지 않는다.
모든 경계가 희미해진 공간에 남은 것은 분위기다. 저절로 몸을 움직이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분위기, 싸구려 모조품이 진정으로 멋있는 것이 되는 분위기,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분위기. 그 분위기는 기존의 사회적 시선으로 바라보던 것을 새롭게 바라보기를 요청하고,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그 분위기가 곧 하자즈의 메시지다. 어떤 것들은 분위기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