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선언 – 유신애《페트리코어》, 윤향로《캔버스들》

유신애《페트리코어》
스튜디오콘크리트, 2020.7.23. – 9.27.
윤향로《캔버스들》
학고재, 2020.8.26. – 9.27.

*아트인컬처 2020년 10월호 게재

일상의 모든 요소가 디지털로 매개되면서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전통적인 사고와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유신애의 《페트리코어(Petrichor)》와 윤향로의 《캔버스들》은 디지털 문화의 요소를 작업에 대담하게 접목함으로써 이러한 움직임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수행한다. 

현대사회의 문화적 현상을 가져와서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유신애는 남성중심적 문화 습성을 과감하게 사용한다. 그는 디지털 매체가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고도화됨에 따라 더욱 강화되는 남성성 과시 문화의 부분을 끌어와 현 시대의 가치관을 질문한다. 한편 윤향로는 여성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회화 작가로서 자신의 포부와 야망을 담대하게 펼쳐놓는다. 흔히 남성적이라고 분류되는 모더니즘 추상 회화의 전통 안에서 자신의 방법론을 찾아나간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처럼, 윤향로는 여러 종류의 탈매체적인 경향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통의 가장 깊은 내부에서부터 파열을 일으킨다.  

댄싱 아이즈와 윈도 플렉스 

현란한 디지털 게임의 그래픽과 빠른 비트의 음악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유신애의 <<패트리코어>>는 현대사회의 징후적인 문화를 재료로 삼는다. 아케이드 게임, 언더그라운드 음악, 디지털 이미지 등 다양한 장르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과시적인 소비문화, 관음증적 문화, 신자본주의적 관습 등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도 재료가 된다. 

1층에 전시된 <Dancing Eyes> 연작과 <Kägi Panic> 연작은 비슷한 두 편의 게임에서 모티프를 가져온다. ‘Dancing Eyes’는 1990년대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아케이드 게임으로, 적을 피해서 격자 위를 달리는 땅따먹기 게임이다. 이때 격자는 대부분 여성의 옷 위에 그어져 있고, 격자를 달려서 땅을 따먹는 데 성공하면 여성의 옷이 벗겨지고 스코어에 비례한 시간 동안 여성의 몸을 감상할 수 있다. <Kägi Panic>의 모티프가 된 게임 ‘Gals Panic’ 또한 적을 피해 퍼즐을 깨면 그 뒤의 여성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게임이다. 이 관음증적 게임은 여성의 몸이 얼마나 하찮은 보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모티프에서 출발하여 <Dancing Eyes>는 한국사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회의 어떤 징후들을 모은다. 이 징후들은 만연하지만 공기처럼 익숙해서 잘 보이지 않기도 한다. 개업 행사의 댄스도우미, 인형 탈을 쓴 전단지 알바생, 3D 게임 속 여성 캐릭터 등 다양한 신체와 사후 경직되고 있는 동물의 몸이 병치되어 나타난다. 배경으로 깔리는 빠른 비트의 화려한 음악은 이러한 신체들을 더욱 보잘 것 없는 것으로, 흔하고 평범한 것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여성의 몸, 비정규직의 몸, 비천한 몸은 점차 생기를 잃어가는 생선의 살처럼 함부로 다뤄지고 쉽게 대상화 되고 시선에 종속된다. 

한편 표제작 <Petrichor>는 자동차 오디오 시스템을 형상화한 설치 구조물과 그 안에 배치된 영상 작업으로 구성된다. 영상 속 자동차는 강렬하고 큰 사운드에 의해 외관이 흔들리고 유리창에 금이 간다. 이는 ‘윈도 플렉스(Window Flex)’라는 하위문화로, 자동차 오디오를 불법 개조하여 강한 소리의 파동으로 자동차 유리를 흔들고 깨뜨리는, 전형적인 과시형 소비 문화다. 전통적으로 자동차는 부와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화려한 장식을 더하거나 소음기를 제거하는 식으로 자동차를 변형 및 개조하여 자신을 과시하는 남성적 문화의 극단에서 윈도 플렉스는 음악을 과시의 척도로 물신화한다. 여기에서 음악은 청각적인 것이 아니라 진동을 일으키기 위한 물리적이고 촉각적인 것이 되고, 더 크고 웅장한 사운드는 오직 자동차 유리창을 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Petrichor>는 이러한 하위문화를 모티프로 하여 과도화된 소비 중심적 사회의 단면을 지적한다. 강한 파동에 흔들리는 자동차, 방향을 잃은 채 질주하는 자동차는 갈 길을 잃고 사회의 소비 풍조에 휩쓸리는 개인을 상징한다. 작품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중재자는 우퍼 스피커가 만드는 낮고 강한 사운드와 대비되는 클래식 악기의 사운드를 연주하고 이러한 음악은 길 잃은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구속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을 것을 제안한다. 결국 유신애는 디지털 자본주의 문화의 심리적 압박과 사회적 강압을 넘어서 이 시대 안에서 새로운 종류의 자유와 해방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디지털화된 시대의 문화를 자유자재로 자신의 작업에 사용하는 그는 결코 이 문화 자체를 혐오하지 않는다. 애정과 증오가 뒤섞인 시선으로, 자신도 속한 이 시대의 문화를 바라볼 뿐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을 외부자의 위치에 올려놓고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다는 듯이 구는 대신에 그 문화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것을 제안한다. 마른 땅 위에 비가 내린 후에 나는 비 내음을 뜻하는 ‘petrichor’를 제목에 붙이는 유신애는 이 바짝 마른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에 다시 비가 내리고 촉촉한 비 내음이 퍼질 수 있다고 누구보다 희망적으로 믿는다. 

선언으로서 회화

유신애의 전시가 동시대 대중문화를 작업의 내용으로 끌어들인다면, 윤향로의 <<캔버스들>>은 방법론으로서 디지털 문화를 차용한다. 자신의 작업을 ‘세계에 대한 스크린샷’으로 정의해온 윤향로는 대중문화의 요소를 파편적으로 발췌해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왔다. 애니메이션, 고전 만화 등의 특정 이미지를 포착하여 캡처한 뒤, 이를 편집하고 재구성하여 회화의 화면을 구성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작업에서 줄곧 사용했던 대중문화의 요소 대신에 보다 개인적인 서사에 집중함으로써 페인터(painter)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회화의 내부에서부터 파열을 일으키고 새로움을 만든다. 

이번 전시는 전시장의 모든 벽면을 감싼 ‘디지털 매핑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실물로 구현되지 않은 가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디지털 매핑 이미지는 여성 추상화가 헬렌 프랑켄탈러의 카탈로그 레조네의 페이지 캡처로 구성된다. 작가는 이러한 가상 이미지를 제작한 뒤 그 이미지 안에서 100여 개의 조각을 오려 내서 이를 실물 회화로 구현하고 전시장 벽에 걸었다. 그러므로 전시장 벽에 걸린 사각형의 회화는 가상 이미지의 존재를 증거해주는 파편이 된다. 마치 벽에 난 구멍에 눈을 대고 바깥의 풍경을 엿보듯이 관객은 전체 이미지의 파편으로서 작품을 보게 된다. 

전작에서 그러했듯이 윤향로의 이번 작업 또한 겹겹이 쌓인 레이어로 구성된다. 프랑켄탈러의 카탈로그 레조네 이미지 위에 에어브러시로 채색한 평면이 쌓이고 그 위에 오일 바로 그린 선이 쌓인다. 흑백의 책 페이지 위로 반투명한 푸른색의 레이스가 덮이고 그 위에 비정형의 선이 그려지는 것이다. 이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제된 디지털 이미지 위에 불규칙적으로 그어진 곡선은 강렬하게 손의 움직임을 호출한다. 기술적 이미지 위에 각인처럼 남은 수동적 이미지(manual image)는 이것이 결코 전통적 회화의 관념과 급진적으로 결별하지 않겠다는 것을, 바로 그 전통 안에서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레이어들은 전작과 달리 작가 개인의 서사를 강렬하게 호출한다. 그것은 앞선 시대를 산 선배 여성 화가에 대한 인식이자,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며,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겪은 여성 작가로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자화상’이라고 명명된 이 레이어들은 자신이 어떤 서사를 다루고 있으며, 그 서사가 어떤 맥락에서 왔으며 앞으로 어떤 맥락에 놓일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겹겹이 쌓인 레이어는 평평하지만 결코 평평하지 않다. 어떠한 깊이도, 두께도 구현하지 않는 물리적 평평함은 서사라는 강력한 의미론적 두께를 담고 있다. 이러한 플랫(flat)을 배신하는 플랫은 이 시대의 새로운 플랫으로서, 여성 회화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윤향로의 회화는 디지털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회화라는 아주 오래된 매체의 질감을 바꾼다. 그러므로 그의 회화는 한편으로 회화를 가장 현재적인 것으로 변형하는 새로움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회화라는 낡은 매체에 집착하는 집요함을 가지고 있다. 회화의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는 그는 줄곧 자신의 작업을 ‘유사 회화’라고 칭하지만, 그의 작업만큼 진정으로 회화다운 것도 없다. 그것은 그저 회화이며, 어쩌면 가장 동시대적인 회화라고 할 수 있다. 미술의 역사 속에서 어떤 회화들이 당대에는 ‘회화’로 인정되지 못했을지라도, 결국 회화가 된 것처럼, 레이어가 겹겹이 쌓인 디지털적 회화는 현재적인 것으로서 오늘날의 회화에 수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