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환대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광장/조각/내기》

광장/조각/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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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쇼핑몰은 늘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그곳은 한 번도 나를 배척한 적이 없다. 아직까지는. 그러나 그 환영의 인사가 사실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지불할 값을 향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에게 지불 능력이 사라진다면, 그 환영의 인사도 한순간 거두어질 것이다. 선택적으로 환대를 건네는 공간. 완전히 깨끗하게 정돈된 구조, 화려하고 현란한 디스플레이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공간. 강은희의 <라이브–드라이브>는 이러한 대형 쇼핑몰의 지하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지상의 활기와 소음과 대비되어 이곳은 시간도 장소도 새겨져 있지 않다. 편의를 위한 장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제거된다. 빠르게 진입하고 빠르게 나갈 수 있도록,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강은희는 그 공간, 도시의 어지러운 정보는 제거되고 최소한의 기능만 남은 지하주차장이 역설적으로 제공하는 편안함을 다룬다. 그는 때때로 지상의 번잡함, 혹은 소속감과 상실감에서 빠져나와, 마치 동굴 같은 공간에 웅크리고 있는 것에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물론 이 공간이 떠받치고 있는 세계의 욕망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함을 동반하지만, 그 머리맡에 은밀하게 잠복해 있다가 일격을 가하는 꿈을 꾸면서 그는 잠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편 누군가는 그 지하주차장의 낯선 감각 속에서 현기증과 메스꺼움을 느낀다. 그 주차장 또한 열린 공간이 아님은, 선택적으로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공간임은 두말할 것 없다. 어떤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여러 함의를 지닌다. 그 공간의 규칙에 익숙하다는 것이며, 그 공간에서는 안전하다는 것도 포함된다. 그 주차장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하주차장이라는 자본주의적 공간, 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지하에 존재하는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집 아래에도 비슷하게 생긴 지하주차장을 갖고, 그 공간으로만 택배 기사가 다니게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낯선 공간, 자본주의적 규칙에 따라 구성된 공간에서 길을 잃는다.

차지량의 <Party>는 닫힌 공간인 고급 호텔의 객실을 일시적으로 열린 공간으로 바꾼다. 친절한 인사를 건네는 직원이 현관문을 열어주고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의 로비를 지나 객실에 들어선다. 그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서울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객실 뷰와 함께 차지량의 작업이 전시된다. 객실 텔레비전에서 작업이 상영되고, 관객은 편안하게 공간을 즐기면서 작업을 감상할 수 있다. 그는 호텔 객실을 불완전하나마 일시적인 환대의 공간으로 바꾼다. 텔레비전에는 작가가 강원도, 경상도 등의 지역에서 생활하며 제작한 작업이 연달아 상영된다. 서울을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느낀 것의 총체가 담긴 사운드와 영상이 가장 서울적인 경관이 보이는 곳에서 재생된다. 상영된 네 편의 작업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작업 <내세>는 작가가 경북 의성 내세마을에서 머물며 제작한 영상이다. 작가는 지자체의 청년 빈집 거주 사업에 참여하여 농촌 지역인 내세마을에 얼마간 머물며 지역 주민들과 유대를 형성하고 이러한 유대의 감정이 담긴 영상을 제작한다.

영상 속 시골마을은 경계가 없는 공간이다. 사유재산으로서 공간이 완전한 경계로 구획된 도시, 수많은 사람이 벌집처럼 살고 있지만 벽 너머의 사람을 알 수 없는 도시와는 다른 곳이다. 그곳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의 집을 쉽게 드나들고, 서로의 물건을 빌려주고, 서로 먹을 것을 나눈다. 그것은 도시에서는 접할 수 없는 ‘진정한 환대’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차지량은 마을 주민의 환대를 받으며 물건과 양식을 빌리고 그들과 어울려 일시적인 공동의 순간까지 만들어낸다. 한편 서울의 고급 호텔에서 그 장면을 보는 나는 감동과 위로,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스크린 너머의 환대와 유대를, 마치 가본 적 없는 고향의 기억처럼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화면 너머로 그 풍경을 보고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한 시골마을이 나에게 환대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사적 공간이 보장되지 않는 시골마을의 문화는 때때로 외지인 여성에게 위험으로 돌아온다. 나는 내가 누릴 수 없는 환대와 유대의 경험을 그의 작업으로 간접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작업들은 의도치 않게 환대의 다층적인 면을 보여준다. 밝은 미소와 따뜻한 말로 환대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조건부의, 선택적인, 상대적인 환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공간의 열림/닫힘, 환영/배제의 논리는 상대적으로 작동한다. 자본을 조건으로 문을 열어주거나 사회적 약자에게 동일한 호의를 베풀지 않는 환대를 ‘진짜 환대’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한다. ‘진짜 환대’, 혹은 김현경이 데리다의 개념을 빌려 말하는 ‘절대적 환대’는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바라지 않고, 복수하지 않는 환대다.1 선택적으로 누군가에게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사람, 조건이 다른 사람, 자본의 유무와 무관하게 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대는 특정한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공동체와도 달라서,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람들도 일시적으로 만나서 친밀함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미술이 바로 그러한 공간이 될 때, 즉 절대적 환대의 공간이 될 때, 그것이 공공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 이질적인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그러한 차이를 서로 받아들이는 장소로 기능할 때, 미술이 공공적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미술은 차별과 배제, 편견에서 벗어나 수평적 소통이 가능한 담론적 공간이 될 때 공공성을 지닐 수 있다. 이때 담론적이라는 것이 곧 현실 정치의 의제를 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다양한 의견이 만나고 충돌하고 협의할 때, 그것이 담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방식으로든 넓은 의미의 정치를 하는 작품 모두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광장/조각/내기》는 관용(官用) 사업으로서 ‘공공미술’을 넘어서서 담론적 공간으로서 새로운 광장을 만들고자 한다. 그들은 국가중심적 행정 사업이 되어버린 ‘공공미술’이 차지해버린 자리를 재탈환하여, 진정한 환대의 공간으로서 미술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최황, 최태훈, 김재민이는 상징이 담긴 기념비로 공공미술을 이해하고, 그러한 기념비가 “공공=국가”라는 전제하에 권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최황은 88올림픽 성화를 모티프로 한 공공조각을 중심으로 기념비가 국가적 상징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지적한다. 그는 그야말로 수평적 담론의 공간이 되어야 할 곳이 권력과 권위를 보존하고 심화하기 위한 곳으로 사용되는 것에 반기를 들고 이를 뒤집고자 한다. 최태훈은 우리 사회에서 기념비와 상징이 작동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미니어처로 반복한다. 국가를 상징하는 영웅이 기념비로 제작되고 소비되는 과정은 상업 제품의 홍보와 판매 문법으로 치환해서 등장하고, 이는 마치 현실의 축소판처럼 공공 기념비의 특징을 조망하게 해준다. 김재민이는 그러한 기념비가 조형물뿐만 아니라 장소 자체로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가상과 실제가 뒤섞인 루트를 통해 서울 주변부 지역에 스며들어 있는 기념비적 성격을 발견한다.

강은희, 차지량, 주현욱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한다. 강은희는 쇼핑몰이라는 자본주의적 공간이 광장의 형태를 모방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상황에서 ‘진짜 환대’가 일어날 수 있는 광장은 정말 사라진 것인지 질문한다. 차지량은 지자체 정부가 관리하는 서울광장이 보이는 닫힌 공간을 일시적 환대의 공간으로 변환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 작업을 추적하면서 미술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동시에, 이상향으로서 환대의 공간을 제시한다. 주현욱은 우리 사회에서 환대와 적대가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관계는 공공성이라는 이름하에 일어나는 활동에 의해 심화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들 작업은 현실 정치의 이슈를 다룬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유와 대화를 촉발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광장/조각/내기》가 시도한 것처럼 담론적 정치를 행하는 광장을 펼치려고 할 때, 미술은 공공적인 것이 된다. 이들은 제도화된 공공미술을 흑백 논리로 비판하는 대신에 공공을 이야기하는 복수의 광장을 만들고자 했다. 공공성에 질문을 제기하고, 지금의 공공성을 비판하고, 공공성을 새롭게 정의한다. 이로써 이들은 오명이 되어버린 ‘공공미술’에서 공공미술을 구제한다. 바로 이러한 순간에 미술은 담론의 장소가 되고, 환대의 장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