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항해 – 우정수 개인전《Where Is My Voice》

우정수 개인전 Where Is My Voice
두산갤러리 서울
2020.11.18.-12.23.
*도록 게재 원고

회화는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가? 오랜 시간 문학과 대결하면서 고유한 매체성을 갖고자 노력했던 회화의 역사를 떠올리면, 그것은 쉽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퇴행적인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회화는 문학의 도구가 되어 한 순간만을 그리는 대신에 이야기가 아닌 다른 것을 표현할 것을 요구 받아왔고, 자신 안에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를 반박하듯이 우정수는 이미지로 이야기를 다루는 데 천착한다. 그는 주제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사실 회화가, 평면의 이미지가 더 깊고 중요한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으로 힘을 겨루는 두 사람, 결투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스마일맨, 나룻배 위에서 무언가를 찾는 사람은 실은 다른 서사에서 옮겨온 것이지만, 우정수의 회화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 이미지의 이야기가 된다. 

단선적 서사에서 공백의 서사로

꽤 오랫동안 우정수는 색을 최소화한 흑백 드로잉을 그렸다. 종이 위에 일필휘지로 그려나가는 선은 굵기와 농담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도상에 시선을 모은다. 시각을 분산하는 색을 배제하여 도상의 형태와 그 형태가 전달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단숨에 그리는 선은 시작에서 끝을 향해가는 단선적인 이야기를 닮았다. 17세기 책에 들어간 목판화 삽화를 닮은 이 그림들은 어쩌면 사실 그림의 본령이 이야기를 담는 것이었다고, 그것이 오직 문자 언어의 역할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회화가 서사를 다루지 못한다는 현대적 사고가 얼마나 편협한지를 드러내듯이, 그는 그림으로 무한한 이야기의 세계를 펼쳐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우정수의 그림은 점차 변화한다. 그의 그림은 여전히 이야기를 담지만 그 방법은 다소 달라진다. 2018년에 발표한 <Calm the Storm>은 성경 이야기 중 하나인 ‘예수가 폭풍을 잠재우다’ 일화에서 출발한다. 그 일화에서 절정으로 향해가는 순간, 즉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의 장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것은 이 명료한 도상이 아니다. 대형 캔버스 여러 개를 결합하여 만든 이 작품에는 서사의 파편과도 같은 이야기 조각이 흩어져 있다. 분명하게 이야기를 지시하는 도상과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와버린 도상, 그리고 마치 막과 막 사이의 암전을 닮은 듯한 공백의 도상이 공존한다. 이처럼 도상은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고 서사에 공백이 생기면서, 이미지는 보다 자유로운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전까지의 그림이 이야기를 가능한 성실하게 대변하였다면, 이때부터 그림은 이야기를 넘어서서 존재한다. 이야기가 결코 담지 못한 것, 이야기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다루기 시작한다.

비록 그 안에서는 도약이 있었으나 이때까지도 우정수의 그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흑백의 선을 위주로 도상과 공백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다양한 색을 사용하면서 시각적으로도 확연히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Protagonist> 연작은 거친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배가 중심 이미지가 된다. 거친 바다 위의 배는 『오디세이아』부터 『모비 딕』까지 항해가 중심이 되는 수많은 여정 서사를 떠오르게 한다. 여기서 흑백 드로잉으로 그려진 바다와 배는 하나의 색으로 덮인다. 붉은색, 푸른색, 녹색이 하나의 톤으로서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Protagonist-vermillion>(2018)은 제목 그대로 버밀리온이라 불리는 붉은 주황색이 화면 전체의 기반이 된다. 버밀리온을 전체적으로 놓고 그 위에 푸른색을 덧칠한 그림에서 색은 하나의 분위기를 만든다. 거센 파도에 맞서는 배의 위태로움은 색의 분위기로 고조되고, 그 앞뒤의 이야기를 암시한다. 이로써 흑백의 선으로만 이야기를 담는 것을 넘어서서 색 자체가 이야기의 요소가 되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직조하는 이미지

<Protagonist> 이후 우정수는 더욱 적극적으로 색을 사용한다. 덕분에 우리는 우정수가 흑백의 선을 다루는 데에만 능란한 줄 알았던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깨닫는다. 그는 대담하게, 자유자재로 색을 펼쳐낸다. 그는 대상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이를테면 장미를 빨갛게 표현하기 위해 붉은색을 사용하지 않는다. 색은 종종 형상의 외곽선을 벗어나고, 개념적 색상을 벗어나고, 하나의 면이 되어서 대상을 덮는다. 그러므로 색은 형상의 정확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형상으로 담지 못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다.  

2019년 이후의 작품은 이러한 변화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는 커다란 캔버스를 넓은 색면으로, 나아가 벽지를 닮은 패턴으로 채운다. 그 화려한 패턴의 틈에 도상이 자리한다. 파도 위의 배, 호신술을 겨루는 두 남자, 창문을 넘어가는 여자, 달리는 자동차 등 이야기를 담은 도상은 화면의 틈처럼 패턴 사이에 끼어서 존재한다. 이러한 특징은 대형 캔버스 작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캔버스는 넓어졌으나 도상은 여전히 이전과 비슷하게 작은 크기로 남고, 넓은 면적을 색과 패턴이 차지한다. 도상의 절대적 크기가 캔버스에 비례해 늘어나지 않으면서 서사의 밀도가 아닌 공백이 증가한다. 이에 더해 패턴의 질감이 두드러지면서 도상의 비중은 더욱 축소된다. 도상은 더 이상 주인공을 자리에 놓이지 않고 전체 패턴과 함께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색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우정수는 화면에 여러 겹의 이야기를 겹치기 시작한다. 종이에 선으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이전의 방식은 단선적인 서사를 전달하기에는 어울렸지만, 이야기의 겹을 만들기에는 부족했다. 색의 층이 겹겹이 쌓이면서 이야기도 겹겹이 쌓이게 된다. <물 위의 남자(Man on the water)>(2019)는 화면을 메운 패턴 위에 붉은색 붓자국이 끼어들면서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항해하는 배 도상이 그 새로운 공간에 안착한다. 패턴의 레이어와 도상의 레이어가 겹치면서 서사는 교차하고 중첩된다. <밝은 내일(Brighter tomorrow)>(2019)에서는 화면의 일부를 도려낸 것 같은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도상을 넣는다. 마치 위에 오는 레이어에 구멍을 내서 그 아래에 놓인 레이어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 구멍을 들여다보면 침몰하는 배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색은 여러 겹의 층을 만들고 도상은 그 겹의 틈에 산재한다. 이전의 흑백 드로잉이 시작에서 끝을 향해 달려가는 한 편의 서사시를 닮았다면, 파편화되어 산재하는 도상과 공백의 색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단선적 서사를 파괴하는 부조리극을 닮았다. 이로써 선형적, 진보적 서사에서 소외된, 가시화되지 않은 이야기가 화면에 공존하게 된다. 

나아가 <Phineus>(2019) 연작은 어떠한 도상도 담지 않고 완전한 면으로 이야기를 시도한다. 오직 아르누보 스타일의 식물 패턴과 사선의 마름모로 구성된 아가일 패턴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구체적 도상을 담지 않은 채, 그 자체로 벽지처럼 서 있다. 벽지를 닮은 회화는 얼핏 아무런 이야기도 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 신화의 장님 예언자 피네우스를 가리키는 제목은 많은 이야기를 암시한다. 그 많은 이야기는 직접적인 도상이 되어서 눈앞에 나타나는 대신에 색과 면, 공간으로 존재한다. 서사는 공간이 되고, 이로써 회화 혹은 이미지는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Where the Voice Is>는 전시장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작품이다. 폭발하는 화산, 한 곳을 바라보는 남자, 대왕오징어와 맞서는 사람, 그리스 신화의 장면이 반복되고, 롤러로 잉크를 덧바른 면과 마름모 패턴이 곳곳에 나타난다. 이 도상들은 서로 연결되어 선형적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대신에 흩어져서 존재한다. 중심 도상으로서 반복되는 화산과 남자는 디즈니 만화책 『해저 2만리』(1954)에서 빌려왔으나 그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여전히 만화의 유쾌한 필체를 지니고 있지만, 남자의 시선이 닫는 자리가 텅 비어버리면서 공허함의 감각을 더하게 된다. 

나아가 이들은 서사의 씨앗만을 가진 채 조금씩 변주되면서 반복적으로 존재하고, 이러한 반복은 서사의 면을 만든다. 하나가 아닌 복수가 존재하면 관계가 생기는 것처럼 도상은 반복되면서 공간을 만든다. 이러한 공간적 서사는 그 형식에 기반하여 사회와 구조의 문제를 그 자체로 반영한다. 즉 논리적 관계가 부재한 형상의 반복은 명확한 인과관계와 합리성이 아니라 무질서와 불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나타내는 형식이다. 사회적 목소리를 잃은 존재는 공허한 형상만이 아니라 형식적 구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정수의 작업에서 이야기는 이미지로 반복되는 대신에 새롭게 직조된다. 즉 여기서 이미지는 서사를 기계적으로 번역한 것이 아니다. 우정수의 그림에서 서사는 새로운 문법으로 다시 쓰인다. 그것은 선과 면, 형상과 패턴으로만 쓸 수 있는 이야기다. 이러한 이미지의 언어로 우정수가 새롭게 재구성한 이야기는 닫힌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단선적 서사가 아니라 시작과 끝이 없이 여러 방향에서 흩어지는 서사다. 이러한 서사는 더 많은 가능성의 세계를 펼치는 것으로 짜여진다. 

아직까지는 비중이 크지 않지만 우정수는 유리창 드로잉 작업과 패브릭 작업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을 확장하고 있다. 이는 결국 그에게 중요한 것은 종이나 캔버스, 먹이나 아크릴 같은 특정 재료가 아니라 이미지로 서사를 직조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장르 소설에서 순문학으로, 픽션에서 논픽션으로. 이야기가 있는 것이라면 주제와 분량, 국가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우정수는 진정으로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스 신화부터 DC 코믹스까지 그는 좋은 이야기라면 가리지 않고 흡수하는 사람이다. 이제 그는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짜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서사를 반복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서사를 새롭게 직조하는 이미지로 나아간다. 그가 이야기를 담는 방식에는 변화가 있지만, 그가 결국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더 좋은 이야기를 찾아 가는, 더 좋은 시각 언어를 찾아 가는 그의 항해에는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