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더듬어 만드는 조각 –《인저리 타임》, 《미모사》

《인저리 타임》
뮤지엄헤드, 2021.2.24. – 4.17.
이은영 《미모사》
봄화랑, 2021.2.20. – 4.3.
*아트인컬처 2021년 4월호 게재

오늘날 조각이란 무엇인가? 이 방대하고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동시대에 만들어지고 있는 조각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그 여러 답 중에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조각의 의미를 규명해보는 것도 있을 것이다.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포스트매체 조건의 시대에서도 특정적 매체에 기반한 예술 개념을 유지하기 위해 대안적인 매체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이때 크라우스는 고유한 정체성이란 시간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매체 개념이 과거와의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저는 어디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고 있어요’라고 자연스럽게 과거의 시간과 서사를 더듬어서 그 질문에 답하듯이, ‘매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과거 시간과의 연관으로 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매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이며, 그 역사적 관계성 안에서 정체성을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각의 정체성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조각의 카테고리와의 상호작용 안에서 만들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다섯 명의 조각가가 참여한 기획전 <인저리 타임>과 이은영의 개인전 <미모사>는 각각 상이한 시간을 더듬어 조각이라는 질문의 답을 더듬는다. 

조각의 역사 안에서 
<인저리 타임>은 전통으로서 미술사를 적극적으로 참조하여 오늘날의 조각이 무엇인지 더듬는다. 과거의 조각은 정규 ‘경기 시간(playtime)’에 있는 것으로, 지금의 조각은 그 시간에 덧붙여진 ‘인저리 타임(injury time)’에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부터 이 전시가 과거의 조각과의 관계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전시는 지금의 조각이 과거를 반영하고 비판하고 수용하면서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하여 다섯 명의 참여작가는 조각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참조한다. 작품의 재료, 표현 방식, 문제의식 등 다양한 층위에서 역사의 어떤 지점을 가져와서 응답한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한 눈에 공간을 둘러보았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다. 작품들은 모두 얼핏 보면 익숙하고 찬찬히 보면 낯설다. 그것들은 전통적인 조각의 반복처럼 보이는 동시에 동시대적으로 재탄생한 과거의 유산이다. 곽인탄과 오은은 미술의 역사를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참조한다. 곽인탄은 미술사의 여러 회화와 조각을 참조한 자신의 지난 작업을 자신의 새로운 작업의 토대로 삼으면서, 쌓여가는 조각의 역사를 가시화한다. 그는 이미 그동안의 개인전을 통해 미술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참조하고 저항하는 작업을 보여준 바 있다. 현대 조각의 시작점이 된 로댕에 저항하거나 일부를 수용함으로써 그의 작업들은 조각의 역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존재한다. 나아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동세 21-1>은 그러한 자신의 작품을 한 차례 더 참조함으로써 역사의 문제를 더욱 분명히 한다. 그는 자신의 조각을 다시 참조함으로써 조각의 역사를 쓰는 데에 스스로 동참한다. 이러한 특징은 오은의 작품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오은은 한국 구상조각의 역사를 이으며 그것을 새롭게 현재화한다. 류인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구상조각의 문법을 차용하여 현재적 주제를 다룸으로써 과거의 조각은 동시대 조각으로 재해석된다. <라스트미닛골>은 전통적인 토르소 조각을, 혹은 류인의 대표작 <지각의 주>(1988)를 떠올리게 한다. 어느 쪽을 떠올리든 실상은 무척 다르다. 겉보기에는 브론즈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것 같지만 실은 폴리스티렌 폼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육체는 동시대 스포츠 스타의 재현이다. 이처럼 오은은 조각사의 기념비적 요소를 가져와 현재의 조각으로 탈바꿈시킨다. 

강재원과 이충현은 미술사에서 강력한 밈(meme, 비유전적인 방식으로 전달되는 문화요소)이 된 특정 재료와 형태를 가져와서 동시대 테크놀로지로 재해석한다. 강재원은 공기주입식 조각이라는 현대미술의 특징적 재료를 사용한다. 그러나 컴퓨터 3D 프로그램으로 형태를 제작함에 따라 그의 공기주입식 조각은 과거의 그 조각들과는 다른 형태와 구조를 갖는다. 3D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도구(tool)를 이용하여 조각한 형태는 기본적인 동작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듯 디지털적으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처럼 디지털적으로 매끈하게 형상화되어 가상공간에 존재하던 조각은 물리적 공간으로 ‘내보내기(export)’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탈각된 부분과 새롭게 덧붙여진 부분을 안고서 현실과 어긋난 채 우뚝 서 있다. 이충현은 3D 프로그램으로 모델링한 조각에서 미니멀리즘 조각의 방법론을 호출한다. 전시장 외부에 위치한 <Trinity>는 세 개의 동일한 조각으로 구성된다. 동일한 모양의 조각은 각각 다른 배치로 반복됨으로써 미니멀리즘의 문법을 상기하게 한다. 조각의 표면에 수면의 풍경이 비치면서 미술사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된 경험과 지각의 문제 또한 주제화된다. 한편 최태훈은 기성품(ready-made)을 사용하는 미술사적 방법론을 참조하면서 새로운 조각을 시도한다. 특히 동시대에 만연한 이케아 제품으로 만든 구조물과 SPA 브랜드 의상을 입은 마네킹으로 과거의 조각을 대체한다. 동시대의 일상을 차지한 제품으로 조각의 재료를 대체하고, 이로써 동시대 조각의 새로운 문법을 형성하고자 시도한다. 

현대적 주체는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자신을 서사화함으로써 탄생한다. <인저리 타임>의 조각에서는 부서진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새로운 역사를 쓰겠다는, 역사적 주체로서의 의지가 발산한다. 그들은 과거의 시간을 경유하여 조각의 의미와 자신의 자리를 더듬는다. 개념적으로 탄탄하게 과거의 미술을 참조하여, 영리하게 지금의 시간을 정의한다. 

이질적 요소의 참조
이은영의 <미모사>는 미술과는 거리가 먼, 이질적인 것들의 시간을 참조한다. 그동안 이은영은 시나 소설 등의 문학 텍스트, 사회적 풍경이나 개인적 경험을 조형언어로 시각화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번 개인전 <미모사>에서는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의 산문시 「미모사(Le Mimosa)」(1952)와 작가가 유학시절에 미모사 꽃나무를 보았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도 시적 언어 혹은 경험은 어떻게 조형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에 관한 고민이 이어진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노란색과 에메랄드색이 눈에 띈다. 두 색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는 미모사의 꽃이 피는 계절을 떠올리게 한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납작한 원통형의 받침에 황동 미모사가 꽂히고, 미모사 꽃과 같은 노란색의 막대 위에 매듭을 촘촘히 묶은 수술이 달린다. 구슬이 늘어지거나 깃털이 솟기도 한다. 이질적인 재료와 형태의 결합은 비정형화된 조형 언어로 새로운 감각을 구현한다. 

이전의 전시가 여러 조각이 모여 만들어내는 풍경으로서 설치에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는 개별 조각을 좌대에 올림으로써 조각으로서 작품이 되기에 집중한다. 지난 개인전 <밤을 달여 놓아두었다>에서 이은영은 테이블 위에 올라갈 수 있는 크기의 작은 조각들이 군집을 이루는 풍경을 만들었다. 촛대나 화병을 닮은 것 같기도 한 조각들은 이질적인 색과 모양이 어우러져서 혼종적인 공간을 구성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러한 이질성을 개별 조각 안에서 구현하는 데 집중한다. 각각의 좌대에 놓인 개별 조각은 서로 다른 요소를 섞어서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를 만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은영이 구현하는 조형성은 전통적인 조각의 역사보다는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했던 초현실주의의 문법을 잇는 것으로 보인다. 즉 초현실주의 조각에 한정되지 않은, 문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초현실주의의 표현 방법을 가져와 조각의 조형 언어로 사용한다. 혹은 그보다 더 강력하게, 말하자면 ‘근본 없는 것’으로서 꽃꽂이나 액세서리 같은 장식적인 요소의 방법론을 참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전통적인 조각의 재료를 적극적으로 끌어와 조각의 형태를 만들고, 이질적인 요소를 맞붙이고 뒤섞으면서 새로운 감각을 창출한다. 

이은영은 역사적으로 공인된 조각의 카테고리에서 자신을 참조점을 찾는 대신에, 그 카테고리 바깥의 요소 혹은 미술사가 정전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에서 지금의 조각을 갱신할 가능성을 찾는다. 그것은 조각이라는 개념을 닫힌 집합으로 상정하는 대신에 계속해서 이질적인 요소를 흡수하고 자신을 확장하는 것으로 상상한다. 이은영의 조각은 정전의 계보 안에서 자신을 서사화하겠다는 의지에 무심하다. 그보다는 조각일 수 있었으나 조각이 되지 못한 것, 새롭게 조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조각을 새롭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