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 개인전 《다목적 헨리》
2019.3.9. – 5.5.
아뜰리에 에르메스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는 횡보 염상섭 선생의 동상이 앉아있는 벤치가 있다. 그리 아름답지도, 의미 있지도 않은 조형물 앞에서 나의 교육받은(?), 오만한 취향은 눈살을 찌푸린다. 그렇게 난데없이 등장하는 도시의 공공조형물이 도시 미관을 저해하는 관료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그 벤치에 앉아 염상섭 선생과 얼굴을 나란히 대고 셀카를 찍는 아저씨나 기념사진을 남기는 초등학생을 보고 있으면 모든 마음이 풀려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이나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처럼 사회적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동상부터 초등학교마다 하나씩은 있었던 위인의 동상까지, 도시 곳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조형물은 못났지만 미워하기 어렵다. 늘 그 자리에 있어도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 날 문득 눈이 마주쳤을 때면 어쩐지 애처롭기도 하고 정이 가는 것은 조각의 역사나 기념비의 의미에 대한 나의 입장과는 무관하다.
정지현의 《다목적 헨리》는 그 익숙하고 낯선 풍경의 일부를 전시장으로 옮겨온다. 공공조형물의 일부를 유토로 캐스팅하여 재현하거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를 재구성해 새로운 조각을 만듦으로써 작가는 도시의 풍경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작가의 손을 거쳐 화이트큐브 안에서 재구성된 도시의 풍경은 낯섦과 익숙함 사이를 오가며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길모퉁이의 공공조형물이 도시의 맥락과 무관하게 갑작스럽게 도착한 과거처럼 앉아있듯이, 전시장의 조각-풍경은 도시의 맥락에서 다시 한번 떨어져나와 관객을 마주한다. 전시장에서 보리라고 기대하지 못한 맥도날드 입간판, 수류탄을 쥔 손, 커다랗고 불안정한 알루미늄 망, 시멘트로 만들어진 스캐너가 한 데 있는 풍경을 보는 것은 당황스러워서 조금 웃음이 나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 단단한 재료와 가변적인 재료가 어우러져서 전시장은 낯설지만 분명하게 균형 잡힌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풍경은 낯설어도 조각조각 흩어져있는 파편들은 늘 보던 익숙한 것이다. 그 익숙한 풍경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보면서 앞서는 마음은 반가움이었다. 언제든 모양을 바꿀 것처럼 서 있는 알루미늄 망, 새파랗게 밝은 형광등, 틈에서 삐져나온 우드락폼, 매끈한 타일로 만들어진 벤치 사이를 걷고 있으면 그 조각조각을 마주했던 도시 속 공간이 찬찬히 떠오른다. 맑은 날이건 흐린 날이건 한결같은 지하상가의 형광등이, 친구와 한참을 앉아서 수다를 떨던 코엑스몰 공연장 계단의 매끈한 타일이, 친구의 작업실이 위치한 오래된 건물의 높고 좁은 계단이 떠오른다. 그렇게 파편은 그 장소를, 그 장소는 그 시간을, 그 시간은 그 사람을 떠오르게 한다.
전시장 한편의 벤치에 앉아 그 매끈매끈한 타일을 만지면서 지난겨울 그와 함께 영화관 로비에서 비슷하게 매끈매끈한 벤치에 앉아서 영화를 기다리던 시간을 잠시 생각했다. 숨을 멈추고 단어를 하나하나 고르던 그 시간이 벌써 멀게 느껴졌다. 그에게 미처 하지 못하고 남긴 말이 전시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시멘트 조각처럼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안쓰러운 조각을, 안쓰러운 말을 꼭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